어느 도심 풍경과 다를 것 없는 광주시 서구 쌍촌동 소재 그의 화실인 송현 서화실은 5층 건물의 꼭대기층에 자리하고 있다. 마감시간에 쫓겨 숨을 몰아쉬고 들른 그의 화실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숨이 더욱 찼다. 하지만 그를 취재하러 온 선택이 대단히 잘 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의 미술인으로서의 삶을 들어보면 입이 쩍 벌어지는 반전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남 장성 출생 한국화가 기경숙(67)씨의 이야기다. 그는 올해 자그마치 화업 50여년째를 맞고 있다. 그저 웃는 얼굴을 접하면 평탄하게 화가의 길을 걸어온 듯 착각하게 된다. 여러 장르를 섭렵했지만 대학에서 전공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여건 때문에 제 나이대에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술이 꼭 대학교를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정식으로 배움의 과정을 거치기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처음에 붓을 잡은 것은 19세 때다. 처음 서예로 입문했다가 영역을 넓혀 문인화로 보폭을 옮겼다. 문인화를 공부한 뒤 다시 한국화로 넘어오는 단계를 밟았다.
오랫동안 작업을 하면서도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결국 56세 되던 해 호남대에 입학했다. 만학도 중 으뜸 만학도였던 셈이다. 당시 노의웅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미술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서양화가들이 한국화가들을 무시하고 터부시하는 흐름이 있다고 느꼈는데 지도교수가 늘 격려해줘 큰 힘이 됐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미 서예와 문인화를 섭렵한 뒤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미술에 눈을 뜬 상태였기 때문이 한결 수월하게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화는 대학에 와서 시작했다. 서예와 문인화에서 얻은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어차피 한국화도 섭렵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던 차였다. 늦은 나이에 주어진 공부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 어느 누구보다 학업에 매진했다. 그랬던 이유 때문에 예술대학 미술학과 수석으로 환갑이 되던 61세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작가는 대학 이전 고 남용 김용구 선생 문하에 들어가 서예공부를 했다. 지금은 서예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가 처음에 서예에 입문할 무렵에는 서예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이 서예는 그에게 필력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서예를 시작했던 것은 집안 내력 때문이었다. 정작 자신도 미술에 관심이 높았지만 친정 조카들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등 집안 자체가 예술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천성적으로 붓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는 문인화로 방향을 튼다. 물론 서예를 놓지는 않았다. 병행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남리 허임석 선생을 사사했다. 한국화는 단헌 정성봉 선생을 사사했다. 서양화도 한국화 영역을 넓히면서 깊이를 더하기 위해 나름 공부했다.
이 세 장르를 섭렵한 것이 그가 50여년 동안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해올 수 있었던 근간이 됐고, 그만의 독창적 세계가 됐다.
첫번째 전시회는 지난 2006년 인천 구올담갤러리에서 선묵화를 선보이는 것으로 진행한 뒤 두번째 전시회부터 한국화을 선보여왔다.
한국화를 하는 동안 줄곧 자연에 천착해왔지만 그의 작품에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결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있다. 자연에 심취하는 점이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가 섭렵했던 장르의 기법들이 모두 투영된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색채 역시 자연에 들어있죠. 거기에서 매력을 느끼는데 실경 산수에 주력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점부터 시작하는 서예의 점묘법과 학부에서 공부했던 서양화와 탱화 등 각기 고유의 기법이 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분채로 아교 섞어 하죠. 실경에 전부 투영되다보니 그림이 산뜻해보이는 등 실질적으로 자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여기다 먹그림으로 밑그림을 한다는 점이다.
"먹그림으로 밑그림을 한뒤 색채로 갑니다. 먹으로 가니까 가볍지 않구요. 또 중후한 감이 있어요. 그림이 가벼워질까 우려해 색채를 과감하게 못쓰는데 저는 과감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가 이렇게 색채에 대해 각별하게 신경쓰는 이면에는 현실적 삶과 무관치 않다. 세상이 암울하며 갈수록 살기가 팍팍해지고 있어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 속 색감을 통해 위안을 삼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어떤 심오한 뜻이 있다기보다는 화사한 느낌을 주고 싶다는 바람이 그의 솔직한 답변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힐링을 하고, 행복바이러스를 가져가기를 바란다.
"그림 잘 그리는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요. 그런 기분 좋아지게 하는 작품을 해보고 싶습니다."

스케치에 관한 생각도 빠뜨리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못가고 있지만 한국화 모임인 실사회 초창기때는 스케치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현장에서 완성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제 그림은 현장에서 완성이 안됩니다. 금방 작품이 안나와요. 몇개월 걸리는 작품도 많죠. 무수히 많은 손길이 가야 하기 때문인데요. 작업이 오래 걸리는 이유죠. 이게 단점이지만 작품을 내놓으면 평은 괜찮은 편이에요."
또 그의 화폭에는 원경과 근경 다 들어가 있어 이것이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한편,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 포함돼 힘이 넘치는 등 강렬하게 구사된다. 원경을 그릴 때는 미래를 투영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투영하곤 한다. 눈앞에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미래를 상상하며 그림에 반영한다.
그는 근경은 힘차게, 원경은 아스라히 멀어져 보이게 표현한다. 이런 점들이 그만의 경쟁력이되고 있는 셈이다.
완성된 그림 한점을 놓고 보더라도 그 작품의 부분만을 봐도 완성된 그림 한점이 되고, 전체적으로 봐도 그림 한점이 된다. 점으로 시작해 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그는 세밀하게 모든 것을 쏟아붙는다.
요즘 그는 재능기부에 한창이다. 빛고을건강타운 한국화교실을 비롯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문인화교실, 서구노인복지관 문인화교실, 화순 도암 복지관, 화순나들이복지관 서예교실 등 예술사각지대나 소외 공간들을 방문해 서예와 한국화를 가르치는 등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아울러 그림에 공부하고 싶지만 여건이 안되는 사람들이 와서 최소비용만 지불하고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화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기도 하다.

한국화가 기경숙은
△전남 장성 출생 △호남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6회 △단체전 150여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빛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한국화 특장전 초대작가 △전라남도미술대전·광주시미술대전 초대작가 △무등미술대전 추천작가 △남농·소치미술대전 심사위원 △개천 미술공모대상전 최우수상 △남도예술은행 선정작가 △실사회 회원 △여류화가회 회원 △광주미협 회원 △송현서화실 운영

고선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