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둥근 테이블에 앉는다. 그 앞엔 삶의 고민들을 꾹 꾹 눌러쓴 ‘고민 편지’가 놓여졌다. 누군가는 호기심에 또 누군가는 절박함을 담아 전했을 편지들이다. 친구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여고생,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어떤 이의 사연, ‘꿈이 없다’는 청소년들의 진로고민까지. 저마다 짊어진 인생의 고민들이 이 작은 테이블에 모였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작은 고민일지라도 당사자에겐 삶의 큰 짐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늘 진심을 담으려 노력한다. 긴 회의 끝에 보낸 이의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진심을 담은 손 편지를 쓴다.
광주시민문화단체 ‘청년문화허브’가 진행 중인 ‘나미야 잡화점을 현실로’ 프로젝트의 한 풍경이다.
2013년 2월 설립된 ‘청년문화허브’는 이처럼 시민들의 일상에 주목한다. 거시적 틀에서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고, 큰 판을 벌이기보다는, "지금 이 시대, 광주 시민들 삶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문화’란 곧 ‘삶’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광주예술의 거리에서 정두용 청년문화허브 대표를 만났다. 정 대표를 대면하기론 처음이었지만 그들의 활동상을 익히 접해왔던 터라, 꼭 오래 보아온 사이 같았다.
그는 청년문화허브 시작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뗀다. 광주 청년들이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조직’했을 법했지만 그 시작은 의외로 가벼웠다.
원래 청년문화허브는 일종의 문화예술커뮤니티로 첫발을 뗐다. 마음 맞는 또래 청년들이 "공연도 보고, 놀아보자"하던 것이 계기라면 계기다. 일주일에 한 번 카페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내용은 단연 문화였다.
몇 번의 모임이 이뤄지고서도 정 대표는 "사실 이러다 시들해지겠지" 했다. 그런데 갈수록 모임이 잦아졌고, 한 번 모이면 누구 하나 자리를 뜰 생각을 안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논의의 주제도 곧 깊어졌다.
기존 문화단체가 하지 않는, 혹은 미처 놓치고 있던 ‘빈틈’들에 대한 지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청년 시선으로 바라본 문화도시 광주의 단면들이었다.
‘청년’이란 타이틀을 걸고, 본격 시민문화운동에 뛰어들자 얼마 가지 않아 주목을 받았다. 설립 당시 2013년 즈음엔 청년문화단체들이 거의 없었던 때라, 자연스럽게 청년문화허브가 주도적으로 일을 도맡게 됐다. 정 대표는 당시를 "가만히 있어도 일이 들어오던 때"라 기억했다.
프로젝트가 늘어나자, 청년문화허브는 고민에 빠졌다. 소위 ‘돈’ 되는 사업과 공익 활동을 병행하다보니 한계에 부딪힌 것. ‘문화기획사’로 갈 것인지 아니면 ‘비영리시민문화단체’로서 제대로 일을 해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우리의 결정은 후자였어요. 당시 청년문화기획사가 많이 생겨난 때 였거든요. 하지만 시민들을 위한 문화 활동이나 문화정책에 개입하고 제안하는 등 공익 영역에서 활동하는 문화단체는 전무하다고 생각했죠. 광주에 NGO 청년문화단체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가 덜 배고팠던 모양이에요(웃음)"
그들은 본격적으로 공익 활동에 뛰어들었다. 공연장 또는 전시장에서 펼치는 문화콘텐츠가 아니라 일상을 변화시키는 문화운동에 무게를 뒀다.
그렇게 탄생해 지금까지 이어온 프로젝트가 앞서 소개한 ‘나미야 잡화점을 현실로’다.
"베스트셀러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광주 판으로 옮겨 놓은 거예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저마다의 고민들을 들어주는 ‘창’이죠. 고민이 담긴 사연을 보내오면 10일 안에 답장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올해 청년문화허브는 이 프로젝트를 전국적으로 확대해보려고 기획 중이다. ‘나미야’에서 힌트를 얻어 시작한 청소년 대상 ‘보노보노 인생학교’ 또한 호응이 좋다. ‘보노보노 인생학교’에서는 지금껏 받은 고민 편지들을 놓고 주제토론이 이뤄진다. 청소년들은 국어·영어·수학 등 정규 과목에서 접할 수 없었던 진짜 인생을 배워간다.
최근 정 대표가 골목하고 있는 것은 ‘연대’이다. 정확히 풀자면 2030 문화인들의 목소리를 모으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광주 대표적 예술인단체는 예총과 민예총이 있어요. 그런데 젊은 친구들은 단체에 소속해 활동하지 않아요. 아마 45세 이하는 찾기가 힘들겁니다. 또 문화재단·시립미술관·박물관 등 문화단체들이 연대한 문화도시협의회에서 또한 젊은 세대들의 입장을 대변해주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그래서 상상현실네트워크를 발족했습니다. 순수 예술 하는 예술인들을 비롯해 문화기획자, 문화단체 등 20여개가 연대한 것이죠."
그렇게 2030 문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창이 열렸다. 이들은 지난 6월 지방선거 당시 10대 핵심 문화 정책과제를 제안했고, 광주시장 후보자들에게 답변서를 받기도 했다. 정 대표는 광주의 문화 정책 방향성을 논의하는 자리에도 ‘상상실현네트워크’란 청년대변 단체로 참여,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문화기획 축을 담당하는 단체들은 많지만, 사실상 문화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꼬집는 등 실제 광주 문화생태계를 개선해 가는데 필요한 일들은 도외시 돼 온 게 사실이죠. 청년문화허브는 NGO단체인 만큼 이 같은 공익적 부분에 제 역할을 다 하려 노력합니다."
그는 5년여 활동하다 보니, 단체명이 조금 아쉽다고 들려준다. 청년문화허브라고 하니 ‘청년문화인’들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서다. 청년문화허브는 활동 주체가 청년들일 뿐, 그들의 프로젝트나 주요 사업들을 살펴보면 그 수혜 대상은 광주 시민들이다. 오히려 ‘시민문화허브’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이유다.
정 대표는 앞으로도 더 재미난 프로젝트를 벌려보고 싶다. 그에게 재미난 것이란, 아무도 하지 않는 일, 그래서 더욱 ‘마이너’ 한 일들이다. 월드뮤직페스티벌부터 레드페스타 등 굵직한 문화기획들을 숱하게 경험해온 터라, 이제 조금 ‘다른 일’들을 해봐야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화라고 하면, 예술을 떠올리죠. 공연장이나 전시장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요. 하지만 저에게 문화는 삶 그 자체에요. 특정 계층이 특수한 상황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일상에 창의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진짜 문화운동을 펼쳐보고 싶어요.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문화로서 삶을 변화시켜주는 것이죠."
그는 어떻게 하면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게 할 수 있도록 할까, 쓰레기 분리수거가 잘 될 수 있도록 어떤 장치들을 넣어볼까 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또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곳, 동성애자들이 차별 없이 당당할 수 있는 인권 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을 찾는다. 공연축제 등 행사성 기획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상에 ‘미션’으로 주어지는 프로젝트 같은 것들이다.
‘문화’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 인가 그 답을 찾고자 하는 여정이다.
"문화도시, 민주인권평화도시 광주란 구호가 구호로서 그치지 않게끔, 삶에 밀착한 문화운동을 이끌어 가보고 싶습니다. 아래로부터의 문화 기획을 통해 아! 이래서 광주는 문화도시구나 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광주 시민들 스스로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도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