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호·제68호) 밝고 활기찬 소녀들이 구 전남도청 앞 광장에 등장한다.
긴 머리를 곱게 땋고서 술래잡기를 하던 이들은 꿈 많고 희망에 가득찬 싱그러운 모습이다. 길을 걷던 소녀가 한 일본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이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극의 초반 밝던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일제의 억압으로, 전쟁의 피해로 피폐해진 모습만 남을 뿐이다. 극이 막바지로 치닫을수록 영혼을 어루만지는 신들린듯한 춤사위가 펼쳐진다. 끝으로 노란 스카프를 목에 두른 소녀가 관객들을 응시하며 막을 내린다.
공연이 끝나자 박수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두 명 앉아 구경하던 관객들이 어느새 광장을 가득 채울 만큼 모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소녀와 함께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 고초를 함께 겪은 표정이다. 공연이 끝난 뒤 줄이 길게 늘어선다. 관객들이 노란 스카프를 두른 소녀와 사진을 찍기 위해 선 줄이다.
광주프린지페스티벌 기획공연이자 돋움무용단의 창작무용극 ‘호남선’의 공연 현장이다. 이 호남선은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을 망라해 일제식민시대의 전반적 억압 풍조 및 위안부 문제와 소녀상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건과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를 춤과 드라마로 창작해 프린지 대표 공연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미치는 피해와 슬픔의 잔상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는 평이다.
지난 12월14일 광주여대에서 한국무용가이자 ‘돋움무용단’의 대표인 박선욱 교수(미용과학과)를 만나 근대사에 주목하는 이유와 구체적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1995년 광주여대가 전문대였던 시절 무용과 교수로 임명돼, 1998년부터 4년제 무용학과로 무용인재를 양성하다가 올해 2월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했다. 대학구조개혁으로 무용학과가 모집중지 되면서 미용과학과로 소속 변경이 됐기 때문이다.
‘돋움무용단’은 2002년 광주여자대학교 무용학과 박선욱 교수가 중심이 돼 제자들과 창단했다. 민속춤의 연결동작인 ‘돋움새’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 명칭에는 창작무용극을 선보이는 만큼 전통과 현대 무용을 아우른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겼다. 그 이름처럼 지역에서 색다른 창작무대를 선보이는 등 지역 무용의 발전을 위해 온힘을 쏟고 있다. 단원은 30여명이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단원은 10명 내외라고 밝힌다.
인적으로 풍부하지 않지만 진도 씻김굿을 기반으로 한 ‘하늘짓’과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오월 아리랑’, 근대문화의 보고인 양림동 100년 역사를 무용으로 조명한 ‘난장(亂場) 양림’, 광주학생독립운동 88주년을 기념해 추상화가 구광모·첼리스트 박효은·성악 송태왕과 함께 한 퍼해닝아트(Perfomance Happening Art) ‘광주-낮달 시리즈’ 등 잇따라 대표작을 발표했다. 또 ‘몸이 바로서야 정신이 바로 선다’는 슬로건 아래 한국문화예술회관 연합회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지원사업의 하나인 ‘마음나눔 몸 세움’이라는 체험형 교육프로그램을 2년째 남구문화예관에서 운영 중이다.

광주프린지페스티벌 기획공연 ‘호남선’ 공연 모습

이런 가운데 박 대표는 돋움무용단의 근간이 되는 한국창작무용에 대해 언급했다.
"돋움무용단의 한국창작무용은 전통춤을 기반으로 해요. 기본 춤사위는 전통에 기반을 두되 무대에서 보여지는 무용 기법은 현대무용의 안무, 구성과 클래식 발레의 극적 전개 등 여러가지 방법론을 수용해 다양한 움직임으로 재창조하죠. 한국적 호흡을 유지해나가면서 현대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담기 위해서는 춤의 형식만 바뀌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질감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무용도 다른 예술처럼 정신과 뿌리가 중요하다"면서 "그걸 작품에 담기 위해서는 역사와 인문학을 알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춤이라는 형식에 스토리를 입혀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의 무용에 대한 철학과 소신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앞서 언급한 ‘호남선’에 대해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광주프린지페스티벌 대표공연으로 선보일만한 작품을 기획하고 있던 중 당시 정형균 감독이 먼저 제안해 호남대 미디어영상공연학과 최영화 교수와 협업해 기획공연으로 올리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좋은 공연물 하나가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이 하나로 묶여질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여러 장르의 전문가 의견이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내면 됐지, 굳이 누구의 작품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냐는 입장이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협업으로 보완되기를 기대했는데 꼭 그렇게 된 것 같다는 입장이다. 이는 박 대표가 생각하는 협업의 행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
또 하나 그가 주목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근대사다.
왜 그는 근대사를 주목하는 무용인이 됐을까 궁금했다. 막힘없는 답변이 따라왔다. 연구실에서 가져온 어릴 적 사진첩을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박 대표는 5살이던 1972년 ‘광주예쁜어린이선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고(故) 고연희 선생님께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진으로 당선된 이후 광주 MBC아역탤런트로 활동하다 중앙대 전신인 서라벌예술대 은방초 교수를* 사사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용 인생에 접어들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프셔서 광주에서 살다 서울에 계시는 은방초 선생님의 수양딸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11살 때 다시 광주로 돌아와 어머니 품에서 자랐습니다. 서울에서 살다 광주로 내려오기까지 6년간을 은방초 선생님과 지내게 됐는데 그때 도제식 교육을 받은 것이죠."
은방초 선생의 교육을 뒤로 하고 그는 남도무용학원의 차금순·박은하 선생 그리고 광주시립무용단의 설립에 기여했던 초대 안무가인 박금자선생 밑에서 무용을 배웠다.
학운여중과 전남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무용과에 진학, 그곳에서 학부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최근 전남대 문화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광주지역 초창기 무용사와 그 당시 무용가들의 생애와 증언사를 모으는 작업을 준비 중이라는 앞으로의 계획까지 상세하게 들려줬다.
"2013년에 (사)한국무용협회 광주시지회에서 광주·전남지역 무용사를 다룬 숙원 사업인 광주 근현대 무용사를 대대적으로 정리해 책으로 묶은 적이 있었어요. 개괄적인 것은 이 자료집에서 다룬 만큼 이를 바탕으로 광주의 근대무용사 구술채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근대한국무용사를 정립하고 체계를 다지는 작업에 온힘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