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호 제76호=글·김인수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손이 운동을 한다고 하니 부모님은 물론이고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극심했어요. 시골마을이지만 6남매를 모두 광주로 유학보낼 만큼 교육열 높은 ‘천석꾼’ 부농 집안이었으니 충격이 크셨을 겁니다. 하지만 배구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장손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죠."
전갑수 광주시배구협회장(59·㈜백양실업 대표)은 배구와의 첫 만남을 묻는 질문에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먼저 떠올렸다.
배구와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뤄졌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매주 열리는 선생님들의 친목대회에 몇몇 아이들을 불러 코트의 라인을 긋거나 돌을 주워 달라 청하셨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얻어먹는 재미로 도와드렸는데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면서 점점 배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자 담임선생님은 이들을 주축으로 배구부를 만들어 직접 가르쳐 주셨다.
초등학교 선수생활이 생활체육 수준의 경험이었다면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전도유망한 엘리트선수로 급성장했다.
"전남 대표로 출전한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개회식 선서를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어요. 왼쪽 주 공격수이자 주장으로 활약해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활약은 계속 이어졌죠."
그러나 국가를 대표하는 배구선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와 달리 대학 진학을 앞두고 좌절을 맛봤다.
전 회장은 당시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으나 대학 간 알력싸움으로 희생양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에 회의감이 든 전 회장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후진 양성의 길을 택했다.
목포고, 목포대 등에서 배구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우연히 사업 기회가 찾아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이듬해 집안 선산이 장흥군 도시계획에 포함됐고, 그 토지보상비는 장손의 사업 종자돈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 업종은 농업용 비닐 생산업으로, 아이템은 집안 형님에게서 얻었다. 농도인 전남에서 농업용 자재 판매는 어렵지 않았다. 톤당 100만원에 들여와 110만원에 팔아 10%의 이윤을 남겼다. 매출이 늘고 독점공급하면서 회사는 짧은 기간에 급성장했다. 일신화학의 실질적인 호남대리점 역할을 하면서 4∼5년 동안 많은 돈을 벌었다. 직원 60명, 전기요금만 월 6000∼7000만원이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무턱대고 뛰어든 사업인데 너무 순탄했다.
어느 날 기회가 또 찾아왔다. 정부가 쓰레기종량제 봉투사업을 시작할 때였다. 광양시와 고흥군에서 시범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그동안 쌓인 비닐 제작 경험을 살려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년여 만에 전남의 모든 시군에 3년간 독점 납품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회계 등 배우고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영업을 하러 기관에 들어가면 공무원들이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젊은 나이에 덩치도 산만한 놈이 사장 명함을 들고 들어오니 신뢰가 안 갔을 겁니다. 사실, 경영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려움이 많았죠. 어떤 기관에는 4번이나 들어갔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았어요."
전 회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맥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뒤로는 사업과 연관이 없더라도 한번 안면을 트면 항상 그 사람과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예상치 않았던 ‘발주’ 정보가 들어오기도 했다.
회사 직원들과도 마음을 주고받으며 일하고 있다.
같이 근무했던 직원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여직원이 있다. 상고를 졸업한 해에 바로 입사했는데 7년간 일하면서 차장까지 승진했고, 틈틈이 공부해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 여직원이 회사를 그만두는 날 성실히 일해준 것이 고마워 1000만원을 줬다.
"사장님과 일한 시간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과 예의범절을 배웠습니다. 시어른들께도 예의범절을 잘 배웠다는 칭찬을 듣고 있어요…." 그 여직원이 결혼을 앞두고 보낸 이 장문의 편지는 전 회장에게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첫 출근하는 직원에게 꼭 하는 말이 있다. "수백만 전남 인구 중에 만난 인연인데 이 만남을 소중히 여기자"라고.
돈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 당황했던 적도 있다. 모 기관과 납품계약을 하는데, ‘장당 5전만 할인해 달라’는 요구를 별생각 없이 들어줬다가 낭패를 봤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모두 5000여 만원이 할인된 것. 이익의 절반을 깎아준 셈이었다. 그 때 직원들하고 돈의 개념, 숫자 개념을 확실히 배웠다.
제품 생산라인에서는 품질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 품질이 떨어지는 원자재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발주처의 신뢰가 쌓이면서 매출은 갈수록 늘었고 자신감을 얻은 30대 중반의 청년사업가는 농업용 박스공장, 물엿공장을 인수하면서 사업 규모를 더욱 확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사업 아이템이 찾아왔다.
보훈복지공단의 민영화 과정에서 공단과 장흥군이 장흥에 시설을 투자하기로 협약했고 전 회장은 이 사업권을 따냈다. 연매출 600억원 규모로 많은 시설투자가 요구되는 사업이었지만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부푼 꿈을 안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생산시설에만 약 100억원을 투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추가 자금 27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생산공장 인수를 접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IMF까지 찾아왔다. 국가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젊은 사업가가 위기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 부도를 맞았고, 연대보증한 RPC공장, 물엿공장, 박스공장이 한꺼번에 채권단의 손에 넘어갔다.
"처음 겪어본 실패의 쓴맛은 오히려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매 경기 엎치락뒤치락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체득한 강한 승부근성은 사회에서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자양분이 된 것 같습니다."
4년여의 은둔생활을 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러던 중 지인에게 의료폐기물 중간처리업 관리를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에서 환경부로 이관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2009년 ‘전국1호’ 사업장인 ㈜이메디원의 허가를 받아냈다. 곧바로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에서 공장을 가동했고 이듬해 고향인 장흥군 장평면으로 사업장을 이전했다.
2010년에는 광주 동구 용산동에 의료폐기물을 수집 운반하는 ㈜나이스를 설립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의료세탁물 전문처리업체인 ㈜백양실업을 인수해 의료폐기물 처리의 3각 축을 완성했다.
내년에는 사업 규모가 대폭 늘어난다. 최근 장흥 ㈜이메디원 공장에 150억원을 투자해 폐기물 소각장 설비를 3배로 늘렸고 며칠 전 정식 허가를 받았다.
다시 시작한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드니 배구에 대한 미련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선배 배구인의 권유로 광주시배구협회 기획이사와
부회장으로 활동하다 지난 2017년 엘리트체육회와 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자의반타의반’초대 통합회장에 당선됐다.
"당시 통합광주시배구협회는 극심한 파벌 싸움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후배 배구인들에게 읍소하면서 화합을 강조했죠."
고심 끝에 광주 배구의 구심점을 만들었다. 선배 배구인 22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과 후배 배구인 28명으로 이뤄진 모임은 현재 광주 배구 발전의 중심이자 원동력이 되고 있다. 여기에 수십 년 전에 사라진 ‘광주 배구인의 밤’ 행사를 부활해 지난 2017년과 2018년 성대하게 치러냈다.
짧은 기간 배구협회의 ‘화학적 통합’을 이뤄낸 전 회장은 광주 배구 발전을 위해서도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우선, 학창시절 배구선수로 활약한 경험을 토대로 우수선수 발굴과 육성팀 지원 등 경쟁력을 높이는데 공을 들였다. 1000만원 상당의 체육인재육성기금을 수차례 광주시에 기탁했고, 초·중·고와 대학팀에 장학금과 격려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광주 배구팀들이 전국체전과 소년체전 등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그리고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연계육성 체제완성을 임기 내 목표로 설정했다.
"학생선수들에게 진학과 취업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경영하는 ㈜나이스와 ㈜이메디원에 배구남녀실업팀을 각각 창단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난해에는 여자선수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완성하기 위해 호남대학교 여자배구팀 창단을 적극 도왔습니다."
선수들의 실전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국제대회 유치도발 벗고 나섰다. 2009년 ‘한국-일본 V리그 탑매치’에 이어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를 광주에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2015년에는 광주시와 협조해 ‘현대라이프컵 국제대학배구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해 그해 열린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성공을 뒷받침했다.
지난해 7월과 올해 1월에는 ‘한·중 초등학교 배구대회’를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광주에서 번갈아 개최해 양 지역 우호증진에 기여했다.
또 시민들이 배구를 통해 건강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광주시장기배구대회와 광주배구협회장기배구대회, 무등기전국어린이어머니교직원배구대회, 우리밀배전국배구대회, 삼성그린시티배배구대회, 전국외국인근로자배구대회, 전국비치발리볼대회 등 10여 개의 광주·전국단위대회를 주최·주관·후원하며 시민들의 건강한 삶을 지원했다.

‘광주시민의 상’ 시상식에서 이용섭 시장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있는 전 회장

이런 노력 덕분에 광주 배구동호인의 규모도 2배 이상 늘었다. 협회장 부임 후 2년 만에 204개 팀 4000여 명으로 증가해 시민들이 쉽게 참여하고 즐기는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배구동호인의 저변 확대는 기량 향상으로 이어져 ‘2018년 전국생활체육대축전’에서 광주대표팀이 남·녀부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학교스포츠클럽까지 영향을 주면서 ‘2018년 코보컵 전국유소년배구대회’에서 어등초등학교가 여자고학년부 우승, 남자고학년부 준우승의 성과를 냈다. 지난 4월 광주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생활체육배구대회’는 스포츠가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 보여줬다.
전 회장은 이제 광주실업팀 창단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시청은 남·녀 실업팀이 있고 광주보다 열악한 양산시청도 실업팀이 있는데 광주만 없습니다. 배구협회장 임기가 내년 말에 끝나는데 배구를 발전시키고 후배들 일자리도 만들 수 있는 실업팀을 만드는 것이 제 마지막 직무라고 생각합니다."
실업팀을 만들면 전국체전에 광주 대표로 나갈 수 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수는 물론 프로팀 출신도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전 회장의 판단이다.
전 회장에게 아직 미완의 숙제가 있다. 한국전력 프로배구단 ‘빅스톰’의 연고지를 광주로 유치하는 것이다.
그는 통합광주시배구협회장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한전 프로배구단 유치 공론화를 이끌었다. 한전배구단과 수원시 간의 연고지 계약이 만료되기 3년 전부터 광주시배구협회를 중심으로 유치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방송·신문 등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당위성을 확산시켰다.
이런 노력은 광주시민에게 한전배구단 유치의 당위성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시민과 언론 등 지역사회에서 한전배구단 연고지 이전에 많은 지지를 보내주면서 지역 국회의원들까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역민에게 동계스포츠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꼭 필요한 한전배구단 유치에 실패했습니다. 다음 재계약 때는 지역의 역량을 모아 반드시 유치해야 합니다."
전 회장은 한전이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로 이전한 지 4년이 넘어, 배구단을 광주로 이전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자 대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전이 광주시민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명쾌한 해결 방안을 모색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한편, 지난해 광남일보 중소기업경영인대상에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받은 바 있는 전 회장은 현재 광주시체육회 이사, 한국실업배구연맹 부회장, 민주평화통일 광주남구협의회 부회장, 법무부 법사랑위원회 위원, 대한장애인배구협회 회장 직무대행, 광주시정자문위원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우수 배구선수를 발굴·육성하고 체육 저변 확대에 기여한 공로로 ‘2019광주시민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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