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호 제76호=글·최성국 기자)올해 90주년을 맞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선도해 왔던 전남여자고등학교(구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와 4대째 동문을 배출하며 특별한 인연을 맺은 가족이 있어 화제다.
특히 이들은 1919년 3·1 운동을 벌이다 투옥된 독립 운동가를 둔 집안인 것으로 드러나 일본의 우리나라 수출규제 강화로 촉발된 극일의 시대,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고 박용숙씨(1923년생·57세 작고)와 그의 딸 김행자씨(76), 김씨의 며느리 허현정씨(50), 김씨의 손녀인 박세은양(17).
57세의 나이로 작고한 박용숙씨는 전남여고 9회 졸업생이며 김행자씨는 31회, 며느리는 59회 졸업생이다. 올해 입학한 김씨의 손녀인 박양은 92회다.
이들은 광주지역 학생항일운동의 상징인 ‘전남여고’를 졸업하거나 다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개교한 전남여고는 광주지역 한국인 여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1929년 11월3일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4개 학교 중 유일한 여학교다.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던 사건의 피해자들인 박기옥·이광춘 학생도 전남여고의 학생들이다.
특히 전남여고 본관 건물은 학생독립운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학교 건물로 지난 1999년 광주시 지정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됐다.
1959년에는 전국 1128개교에서 모금운동이 진행돼 여학도 기념비가 건립, 지난 2011년엔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 역사관이 준공되는 등 광주지역의 학생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전남여고의 역사관 관장을 맡고 있는 김행자씨 가족도 항일운동과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김씨의 할아버지인 고 김범수 선생은 1919년 고향인 광주에서 3·10만세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숨겨온 인쇄기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했고 시민들과 함께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 일본에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의고 사고로 남동생을 잃은 김씨는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인 어머니 박용숙씨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김행자씨와 동문인 며느리·손녀, 그리고 손자가 다정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씨는 박씨가 생전 남겨둔 흑백 사진 15장을 최근 복원, 역사관에 전시하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 15장의 사진은 박씨가 이 학교에 재학했던 1936~1938년 사이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1달간 일본에 수학여행을 보낸 사연을 담고 있다.
사진들에는 전남여고 학생 50여 명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며 교토 국립박물관, 도쿄 황거(일본 천황이 거주하는 곳) 등을 돌아보게 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다.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민낯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자료다.
또 전시관 기획전시실과 역사실 등에는 어머니 박씨가 고교 3학년 수업시간에 비단실로 봉황을 수놓은 작품부터 박씨의 학생 신분증, 우여곡절 졸업한 뒤
나주시에서 교감, 담양군에서 교장, 전남도교육청 장학사를 거치는 등 전남지역에서 일평생 교편을 잡으며 살아온 자료들도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전남여고에서 재학한 뒤 전남지역에서 일평생 교편을 잡은 고 박용숙씨의 학생 사진과 졸업증서

어머니의 영향으로 화순초등학교 4년, 광주 남초등학교 3년 등 8년간 교직에 몸 담았다. 이후 김씨는 육아를 전담하다 교직 경험을 되살려 광주 다문화센터 중 하나인 ‘아시아 밝음 공동체’에서 2년간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70세가 넘어선 역사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약국을 운영하는 며느리 허현정씨는 그동안 사는 것에 파묻혀 동창회 일에 관심이 없다 최근 딸의 입학으로 동창회 일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전남여고 장학재단은 개교 92년 만에 4대 가족 입학이라는 기록을 세우자 지난 5월 김씨의 손녀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기도 했다.
김씨는 "첫째 아들이 며느리를 데려와 소개하는 데 모교가 똑같았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지금 와서 동창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하다 보니 선·후배 사이라는 생각도 든다"며 "평소 며느리와 손자·손녀가 집에 자주 들러 사이가 좋지만 학교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나도 학창시절에는 우리 어머니의 모교란 걸 주위에 말하지 않았는데 똑 닮은 것 같다. 신입생들은 입학 초에 전시관을 둘러보고 가는데 손녀가 증조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갔을 거란 생각에 울컥한다"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전시실엔 또 김씨가 학교 생활을 하면서 사용됐던 학년별 배지와 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재학생들에게 지급됐던 기념 배지, 1958년 개교기념일을 맞아 김씨가 학교 동기인 배우 윤정희씨와 함께 무용 공연을 펼쳤던 사진도 고스란히 보관되고 있다.
김씨는 "지금의 세미나실이 60년 전에는 과학교실이었고 1층엔 교장실, 서무실이 있었다. 4·19 때에는 광주고 학생들이 담을 넘어 교실로 들어왔던 기억도 모두 생생하다"면서 "어머니가 가르친 제자가 전남여고로 와 저의 1학년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전시관엔 어머니와 저의 학창시절이 그대로 녹아 있다. 역사관에서 관련 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며느리와 딸을 생각하면 행복하고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사실 김씨가 지난 2015년부터 역사관 부관장을 맡고 지난해 3월부터 관장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는 이유도 어머니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박씨의 심부름을 하며 어머니의 학교 동기들과 친분을 쌓은 김씨는 동창회 활동을 알게 됐고, 지난 1985년부터 동창회 총무직을 맡는 등 모교에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김씨는 역사관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운동 배경과 당시의 시대상 등의 전체적인 안내를 도맡고 전남여고 학생들에게는 매 학기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 계승과 광주 정신’에 대한 강좌를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시민들에게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더 깊이 있게 알리고 전남여고 재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 역사 자료를 보다 더 수집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다방면의 활동 계획도 세우고 있다.
김씨는 "최근 일본이 한국에 보복적인 수출 규제를 하는 등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만행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면서 "분개한 국민들에 의한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여행 자제 등의 목소리를 정부와 정치인들이 귀 담아 듣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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