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동조의 미학 자신만의 작업 찾아야 [남도예술인] 서양화가 박은수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2020년 08월 02일(일) 1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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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호 제87호=고선주 기자)그는 철두철미한 준비로 지역을 대표하는 미술대전을 모두 석권, 실력파 미술인으로 통한다. 광주시미술대전과 무등미술대전, 전라남도미술대전 서양화 부문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그러면서도 요란스럽게 작업하지 않는다. 줄곧 화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재료들을 연구해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정도로 탄탄한 미술적 배경을 갖추고 있다. 이런 연유로 대학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양성해 냈다. 그리고 나서 지금은 오로지 전업작가로 작업에만 집중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의 작업실은 광주시 서구 풍암동 소재 원룸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작업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서 놀라는 게 어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정돈돼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성격의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은 서양화가 박은수씨의 이야기다. 지난 7월16일 오후 서구 풍암동 소재 작업실에서 그에게서 화가로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작업 및 계획에 이르기까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화가의 꿈을 빨리 결정한 편에 속했다. 대다수 화가들은 부모의 반대나 집안 환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는 데 그는 부친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화가에 대한 꿈을 빨리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변함없이 작가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던데는 고향에서의 기억과 부친의 배려가 큰 힘이 됐다는 전언이다.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바닷가가 고향으로 갯벌과 해안가 퇴적층, 일출과 일몰 등 오묘한 자연환경을 보며 자란 것이 훗날 다양한 재료적 실험의 근거가 됐고, 성품이 세심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좀더 섬세한 작가로서의 기질을 발현해낼 수 있었다.
"작가적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크레용이나 물감을 사용해 그리는 식의 평범한 그림을 멀리 하고, 노랑색과 하얀색, 검정색 모래나 홍합, 굴, 바지락 등 껍질을 사용해 작품을 시도하곤 했어요. 그런데 부친이 그 껍질들을 재료로 쓸 수 있도록 으깨줬을 정도로 다정하게 도와 준 것이 큰 힘이 됐죠."
그는 이와 관련해 부모가 반대했더라면 화가의 꿈을 접었을 것이라고 귀뜸했다. 부친이 우호적으로 미술을 하는 아들을 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술에 입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제도권 교육 속에서 첫 출발을 알린다. 중학교 2학년때 TV 프로그램으로 문화산책 같은 것이 있었는데 때마침 부친이 시청 중이어서 그 옆에서 함께 시청을 하게 됐고, 그 자리에서 그는 화가가 되겠다고 부친께 의사를 표시한다. 이때 부친께서 "네가 하고 싶은 것 해라"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 그가 걱정없이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됐다.
화가에 대한 꿈이 빨리 정해지면서 남들보다 앞서 작업 색깔을 찾아갈 수 있었다. ‘평범하지 않게 작업하고, 자신만의 작업을 찾자’는 모토가 오늘날 박 작가의 재료적 소신 혹은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바닷가의 환경이 미술대학에 재학하면도 평범하게 캔버스에 작업을 하도록 놓아주지를 않았던 것 같아요. 물감을 평범하게 쓰기 보다는 마티에르(matiere·재질)를 두껍게 해서 작업을 한 측면 역시 여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보면 돼요. 이게 모두 바닷가가 영향을 준 거죠."
이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업작가로 화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 군 제대 후 방황으로 접어든다. 평범하게 작업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대학 재학시절 공대 교수로부터 재료 공학이나 환경공학, 금속공학 분야 공부를 하면 다양한 재료를 접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 두려운 마음을 뒤로 하고 그쪽에 가서 수강 신청을 하며 재료학 공부에 뛰어든다. 그가 대학원에 재학할 무렵이다. 조교를 하면서 재료학 공부에 심취했다. 자기만의 비장의 카드를 고민할 무렵이라 택한 길이었다. 또 10년후, 20년후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고민이 많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용(미학)과 형식(재료)이 등가점을 이뤄내야 한다는 배움을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재료 구축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이면에는 미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재료 구축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결국 이런 신념이 공대에서 재료를 공부해 재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가 자신만의 재료를 얻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감내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많은 화가들이 유화나 아크릴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질감을 독특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재료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신문에 주목했다. 그는 신문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담고 있는 것이고, 자신이 한동안 전념했던 ‘군상’ 시리즈 역시 우리들의 세상을 담아내기 위해 했던 작업이어서 이게 절묘하게 내용이 맞아 떨어진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신문을 재료로 사용합니다. 제가 실험한 결과의 근거라고 보면 돼요. 평면에서부터 입체에 이르기까지 표현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죠."
실제 그의 작업실 뒤쪽으로 가다 보면 큰 고무통에 짓이겨놓은 신문과 쌓여져 있는, 무수히 많은 신문을 목격할 수 있다. 신문으로 작업하는 군상들이 마치 잔인한 표현같지만 말린 명태와 꽤 닮아 있다. 눈을 가까이 가지고 가서 봤을 때야 그것이 그가 만든 사람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상은 그에게 초창기 작업을 대변한다. 화단에 군상의 작업으로 알려진 계기다. 군상을 거쳐 그는 군상과 도시작업에 한동안 몰입한 뒤 현재 색채 추상 작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는 작업실에서 늘 작업만 생각한다. 미술계 여기저기 끼어 들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몇년새 그는 작업실에 머물며 작업만 하고 있다. 기타 미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작업실을 벗어나는 일을 빼고는 작업실이 그의 집이자 미술적 사유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읽혔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작가는 자기 작업만 해야 한다’는 주의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동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언급이 조금은 고리타분하게 들렸지만 이런 생각들이 바탕이 돼 중견 화가로 그만의 회화세계를 견인할 수 있는 원천으로 이해됐다.
아울러 그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다소 피상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더 신뢰를 보내는 편이다. 이를테면 컵 등보다는 사랑이나 황홀과 같은 것들로부터 더 많은 의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보편적인 것은 오래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울림을 덜 준다고 밝힌다. 그래서 그는 앞서 언급했지만 추상적 작업에의 접근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방향에 더 부합된다는 판단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지극히 감상적인 것들을 물리고 데이터적인 것들에 더 무게를 두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들려준 발언에서 온전한 이해를 가져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근대화가 없는 사회인데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더 가치있게 보지만, 서양에서는 합리적으로 보는 것에 더 가치를 두죠. 그때 그때 감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은 즉흥적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데이터에 근거해 작업을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데이터적 접근이 근거가 확실하니까요. 제가 흔들리더라도 데이터는 정확하잖아요. 결국은 정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술적 고민과 계획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수많은 경험과 시도, 실패 속에서 자신의 대표작이 나올 수 있다고 바라본다. 자기와의 싸움이어야 하고, 오직 예술로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환경적 제약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뜻을 내비쳤다.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생활을 반드시 단순화시켜야 한다고 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생활의 단순화에 주력하고 있구요. 더 나아가 다양한 예술작품을 평면으로만 국한하지 않을 겁니다. 수십미터에 달하는 작품을 현실화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고 있죠. 좀 더 넓은 환경을 가지고 싶구요. 저는 공간이 예술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업실은 광주시 서구 풍암동 소재 원룸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작업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서 놀라는 게 어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정돈돼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성격의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은 서양화가 박은수씨의 이야기다. 지난 7월16일 오후 서구 풍암동 소재 작업실에서 그에게서 화가로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작업 및 계획에 이르기까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화가의 꿈을 빨리 결정한 편에 속했다. 대다수 화가들은 부모의 반대나 집안 환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는 데 그는 부친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화가에 대한 꿈을 빨리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변함없이 작가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던데는 고향에서의 기억과 부친의 배려가 큰 힘이 됐다는 전언이다.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바닷가가 고향으로 갯벌과 해안가 퇴적층, 일출과 일몰 등 오묘한 자연환경을 보며 자란 것이 훗날 다양한 재료적 실험의 근거가 됐고, 성품이 세심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좀더 섬세한 작가로서의 기질을 발현해낼 수 있었다.
"작가적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크레용이나 물감을 사용해 그리는 식의 평범한 그림을 멀리 하고, 노랑색과 하얀색, 검정색 모래나 홍합, 굴, 바지락 등 껍질을 사용해 작품을 시도하곤 했어요. 그런데 부친이 그 껍질들을 재료로 쓸 수 있도록 으깨줬을 정도로 다정하게 도와 준 것이 큰 힘이 됐죠."
그는 이와 관련해 부모가 반대했더라면 화가의 꿈을 접었을 것이라고 귀뜸했다. 부친이 우호적으로 미술을 하는 아들을 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술에 입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제도권 교육 속에서 첫 출발을 알린다. 중학교 2학년때 TV 프로그램으로 문화산책 같은 것이 있었는데 때마침 부친이 시청 중이어서 그 옆에서 함께 시청을 하게 됐고, 그 자리에서 그는 화가가 되겠다고 부친께 의사를 표시한다. 이때 부친께서 "네가 하고 싶은 것 해라"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 그가 걱정없이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됐다.
화가에 대한 꿈이 빨리 정해지면서 남들보다 앞서 작업 색깔을 찾아갈 수 있었다. ‘평범하지 않게 작업하고, 자신만의 작업을 찾자’는 모토가 오늘날 박 작가의 재료적 소신 혹은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바닷가의 환경이 미술대학에 재학하면도 평범하게 캔버스에 작업을 하도록 놓아주지를 않았던 것 같아요. 물감을 평범하게 쓰기 보다는 마티에르(matiere·재질)를 두껍게 해서 작업을 한 측면 역시 여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보면 돼요. 이게 모두 바닷가가 영향을 준 거죠."
이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업작가로 화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 군 제대 후 방황으로 접어든다. 평범하게 작업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대학 재학시절 공대 교수로부터 재료 공학이나 환경공학, 금속공학 분야 공부를 하면 다양한 재료를 접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 두려운 마음을 뒤로 하고 그쪽에 가서 수강 신청을 하며 재료학 공부에 뛰어든다. 그가 대학원에 재학할 무렵이다. 조교를 하면서 재료학 공부에 심취했다. 자기만의 비장의 카드를 고민할 무렵이라 택한 길이었다. 또 10년후, 20년후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고민이 많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용(미학)과 형식(재료)이 등가점을 이뤄내야 한다는 배움을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재료 구축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이면에는 미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재료 구축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결국 이런 신념이 공대에서 재료를 공부해 재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가 자신만의 재료를 얻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감내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많은 화가들이 유화나 아크릴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질감을 독특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재료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신문에 주목했다. 그는 신문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담고 있는 것이고, 자신이 한동안 전념했던 ‘군상’ 시리즈 역시 우리들의 세상을 담아내기 위해 했던 작업이어서 이게 절묘하게 내용이 맞아 떨어진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신문을 재료로 사용합니다. 제가 실험한 결과의 근거라고 보면 돼요. 평면에서부터 입체에 이르기까지 표현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죠."
실제 그의 작업실 뒤쪽으로 가다 보면 큰 고무통에 짓이겨놓은 신문과 쌓여져 있는, 무수히 많은 신문을 목격할 수 있다. 신문으로 작업하는 군상들이 마치 잔인한 표현같지만 말린 명태와 꽤 닮아 있다. 눈을 가까이 가지고 가서 봤을 때야 그것이 그가 만든 사람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상은 그에게 초창기 작업을 대변한다. 화단에 군상의 작업으로 알려진 계기다. 군상을 거쳐 그는 군상과 도시작업에 한동안 몰입한 뒤 현재 색채 추상 작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는 작업실에서 늘 작업만 생각한다. 미술계 여기저기 끼어 들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몇년새 그는 작업실에 머물며 작업만 하고 있다. 기타 미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작업실을 벗어나는 일을 빼고는 작업실이 그의 집이자 미술적 사유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읽혔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작가는 자기 작업만 해야 한다’는 주의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동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언급이 조금은 고리타분하게 들렸지만 이런 생각들이 바탕이 돼 중견 화가로 그만의 회화세계를 견인할 수 있는 원천으로 이해됐다.
아울러 그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다소 피상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더 신뢰를 보내는 편이다. 이를테면 컵 등보다는 사랑이나 황홀과 같은 것들로부터 더 많은 의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보편적인 것은 오래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울림을 덜 준다고 밝힌다. 그래서 그는 앞서 언급했지만 추상적 작업에의 접근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방향에 더 부합된다는 판단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지극히 감상적인 것들을 물리고 데이터적인 것들에 더 무게를 두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들려준 발언에서 온전한 이해를 가져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근대화가 없는 사회인데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더 가치있게 보지만, 서양에서는 합리적으로 보는 것에 더 가치를 두죠. 그때 그때 감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은 즉흥적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데이터에 근거해 작업을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데이터적 접근이 근거가 확실하니까요. 제가 흔들리더라도 데이터는 정확하잖아요. 결국은 정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술적 고민과 계획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수많은 경험과 시도, 실패 속에서 자신의 대표작이 나올 수 있다고 바라본다. 자기와의 싸움이어야 하고, 오직 예술로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환경적 제약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뜻을 내비쳤다.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생활을 반드시 단순화시켜야 한다고 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생활의 단순화에 주력하고 있구요. 더 나아가 다양한 예술작품을 평면으로만 국한하지 않을 겁니다. 수십미터에 달하는 작품을 현실화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고 있죠. 좀 더 넓은 환경을 가지고 싶구요. 저는 공간이 예술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