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살찌우는 ‘예술곳간’으로 변신

100년 역사 자랑하는 건물 5개동 단장한 ‘문화사랑방’
건축·역사적 흔적 고스란히…외벽 감싼 덩굴 매력적
공연장·카페 등 갖춰 "나주의 맛과 멋 담아 문 열 것"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6월 06일(일) 15:13
(2021년 6월호 제97호=글 박세라 기자)




운전을 하고 가다가, 한눈을 판 적이 여러 번이었다. 나주 도심으로 나들이를 간 날엔, 꼭 "어? 저것 뭐야?" 뒤를 돌아다보게 하는 멋스러운 건물이 무심히도 서 있었다. 조금 더 큰 도시였다면, 아마도 벌써 문화공간이나 카페 등으로 변신을 해도 여러 번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최근 지역의 문화 사랑방으로 변신 중인 ‘나주정미소’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 곳 중 하나다. ‘나주정미소’는 1920년 경 지어진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한 시절의 세월이 가득한 외관에 홀딱 빠져,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불쑥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가 옛날 그 정미소 자리여, 지붕까지 곡식이 가득 차 있었제."
지나던 어르신의 설명이다. 마주친 그의 눈엔 오래 전 그 때 풍경이 선연한 듯 흐뭇한 미소가 엿보인다. 한 세기 동안 한 자리를 지킨 이곳이, 동네 토박이들의 기억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마을의 보물창고였던 이곳이 현재는 공연장이자, 체험·전시 공간으로 재단장해 시민들을 맞고 있다. 보리 등 곡물을 찧는 곳이란 의미의 ‘정미소’(精米所)에서 나주의 ‘정’과 ‘맛’ 그리고 ‘웃음’이 피어나는 ‘정미소’(情味笑)로 간판도 새로 달았다. 주린 배를 채워줬던 곳간에서 마음을 살찌우는 공간으로의 변화다. 예나 지금이나 귀한 터임은 분명해 보였다.
애초 오래된 건물을 모두 허물고 새 판을 벌이려했다는데, 사업 시작 전 옛 것을 그대로 살리는 방향으로 틀었다고 하니, 정말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실제 건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결정에 오래오래 박수를 보내고 픈 심정이다.
나주정미소는 총 5동의 건물로 이뤄졌다. 아직은 편의상 숫자를 붙여 부르는데, ‘1동’은 가장 먼저 단장을 마치고 대내외에 공개된 소규모 공연장 ‘난장곡간’이다.
‘난장곡간’은 지난해 11월 광주MBC의 음악프로그램 문화콘서트 ‘난장’의 공연 무대로 활용돼 그 시작을 알렸다. 1980년부터 비워져 사실상 버려진 공간이나 다름없던 곳이었기에 ‘이런 멋진 곳이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내어줬다는 설명이다. 실제 ‘매스컴’의 효과를 아주 톡톡히 봤다. 낮에는 사람 구경도 힘든 한적한 곳에, 아침 댓바람부터 긴 줄이 들어선 것. 난장 출연 뮤지션들을 보러 온 팬들이었다. 본 공연이 시작되는 오후 7시가 다가오자 장사진을 이뤘다. 생경한 풍경에 동네에서도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용인에 사는 필자의 한 지인도 나주까지 원정을 왔었다. 좋아하는 뮤지션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내려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이토록 ‘팬심’과 ‘문화의 힘’은 강하다.
이명규 나주읍성주민협의체 대표는 "새벽부터 줄을 서 모이기 시작하더니 200명이 훌쩍 넘었다. 어렸을 때 정미소에 불이 났었는데, 그 때 이후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온 것은 처음봤다"면서 "구도심 속 보물 같은 ‘나주정미소’가 언론이며 SNS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다"고 기억했다.
이곳 ‘난장곡간’은 150석 규모로, 앞으로 아마추어 동호회나 시민들이 펼치는 소규모 공연 무대를 담당할 예정이다. 이보다 큰 공연무대는 정미소 건물 중 내부 공간이 가장 넓은 ‘3동’을 활용한다. 250여 관객 수용이 가능한데, 전통부터 클래식까지 다채로운 공연예술이 가능한 대공연장으로 단장할 계획이다.
목조 건물인 ‘2동’은 외관상 보기에도 가장 오래돼 보인다. 이 대표는 1920년경 지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인 만큼 이곳의 역사를 되새기는 ‘기억의 공간’으로 꾸며진다. 나주정미소는 정미소이자, 정부양곡창고로 쓰였다. 호남 최대의 곡창지대에서 나온 곡식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길이 난 정미소 앞 도로까지 위쪽으로 컨베이어벨트가 쉬지 않고 곡식을 날랐다. 그랬으니,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이란 뼈아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여기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통학 열차 안 ‘댕기머리 사건’이 벌어진 이후, 나주 지역 학생들이 항일 운동을 모의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무리 중 한 명이 정미소 주인의 손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외벽 목조 구조물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를 새 단장, 한 세기 시간의 기억을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아직 건물 내부는 채 정돈되지 않았는데,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곳의 원시적인 모습이 더욱 멋스럽게 다가왔다. 곡식이 지붕까지 차 있었다는 어르신 말대로, 건물 내부에는 목조 건물의 흔적이 여전하고, ‘보안’이 철저하게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큼직한 철문과 문고리는 생경해서 재미있다.


정미소 안쪽으로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이곳은 마을주민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카페&레스토랑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나주의 건강한 로컬푸드를 활용해 신선하고 맛좋은 한 끼 식사가 가능한 곳으로 변신한다. 무엇보다 외벽을 수북이 덮은 덩굴식물이 눈길을 끈다. 봄여름엔 푸릇푸릇하고, 가을 겨울엔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또 그대로 매력적이다.
그 뒤쪽으로 연결된 곳은 일명 ‘비밀의 화원’이다. 두 그루 나무가 아치를 이룬 문을 지나면, 오랜 향나무며 소나무가 듬직하게 서 있다. 이곳은 향후 매입이 이뤄져야 하겠지만, 야외테라스에서 향긋한 차 한 잔 하기에 제격이다.
지금까지는 코로나19 탓에 잠시 쉬어갔지만, 5월부터 하나, 둘, 재미난 기획들을 선보이고 있다. 재미난 스토리들을 엮어 도심을 돌아보는 ‘나주아이학교’를 비롯해 아기자기한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박물관 마켓’,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도심캠핑’ 등이 그것들이다.
그 중 나주정미소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는 ‘도심캠핑’은 지난 시즌 큰 호응을 받았다. 정미소 안쪽 마당에 텐트를 설치하고, 앞으로는 무대를 만들어 크고 작은 공연들을 펼쳤다. 아이들이 한 줌씩 준비해온 쌀을 찧어보는 ‘정미체험장’도 인기를 끌었다. 상시적으로 체험이 가능하도록 ‘4동’ 건물을 문화체험공간으로 마련할 복안이다.
이 대표는 "지난날 든든한 양식 창고가 돼줬던 정미소가 오늘날 예술을 향유하는 멋스러운 공간으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며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최대한 살리면서 나주의 맛과 멋을 담아낸 ‘문화사랑방’으로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주정미소 건물은 리모델링 설계에 들어갔고, 가을께면 공간 조성이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천년 고을 나주는 그 명성대로 도심 곳곳에 유서 깊은 건물을 꼬옥 품고 있다. 이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나주나빌레라문화센터’를 시작으로 ‘나주정미소’ 그리고 지난 1월 시가 매입해 변화를 앞두고 있는 ‘나주극장’까지. 어여쁘게 단장돼 시민 품으로 돌아가고 있어 반가운 마음이다. 마치 긁지 않은 복권을 꼭 쥔 것만 같다. 나주가 발산할 시너지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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