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제105호=고선주 기자)정읍은 동학의 고장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동학은 곧 정읍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봉준 장군의 고택이 있고, 농민들이 고부 관아로 진출하기 전 집결하던 말목장터가 있다.
그래서 정읍하면 동학이 곳곳에 서려있는, 동학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동학을 떠올린 것은 특별한 애국심보다는 어쩌면 동학이 근현대 역사에서 하나의 원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발발한 지 128년이나 지났기에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사건으로만 기억될 수 있다. 민초들이 부조리에 항거해 일어섰다는 측면에서 민주화 분수령이 됐던 4·19의거나 5·18광주민중항쟁은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농민전쟁에 가닿는다. 역사는 늘 그렇게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근본을 모르는 민족과도 같다. 역사를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반면교사 삼을 때 민주화된 세상은 더욱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번 문득여행에서 왜 동학을 떠올렸을까. 그것은 순전히 1894년 음력 1월10일 고부봉기 또는 갑오농민전쟁이 촉발됐다고 하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냉택없는 방문은 아닐 것이다. 전북 정읍 입암면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20여 ㎞를 넘게 내달렸다. 갑오동학혁명 100주
년 기념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내장산 지구에 있기에 아래로부터 훑어올라갈 요량이었다. 100주년 기념탑은 앞으로는 내장호가 자리하고 있고, 뒤로는 내장산국립공원서래봉과 불출봉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기념탑은 듬직하게 일떠선 죽창의 위용을 형상화하고 있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대나무를 옆에 세웠음을, 그리고 가운데 농민들의 웅혼한 기상을 형상화했다는 것쯤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터다. 그 웅혼한 기상이 오히려 병풍처럼 펼쳐진 내장산마저 압도하는 듯하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몇몇 가족들이 썰매를 타는 전경이 정겹게 보였다. 이곳에는 기념탑 외에 내장산 조각공원과자생식물원, 솔티 달빛 생태숲 조성이 돼 있다. 이곳에서 지난해에는 KBS2 월화드라마 ‘경찰수업’ 촬영을 한 모양이다. 한편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 건너에는 석조각 조형물 ‘샘골의 빛’(박진희 작 2002)이 세워져 있다.
앞서 언급한 전봉준 고택은 좀더 고증에 의해 옛 모습 그대로 지워졌더라면 더욱 사실감을 더 높였을 것이다.
1878년(고종 15년) 지은 초가형 일자이자 흙담 네칸의 오두막집이었다. 원래는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이었지만근래 한칸을 더 붙었다고 한다. 규모가 너무 왜소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필자 입장에서는 이것 역시 왜곡이라는 생각이다. 복원된 생가나 고택을 가보면 한결같이 기술로 지어진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어 늘 아쉬웠다. 유명한 문인이든, 정치인이든, 위인이든 주식회사 표 복원술로 획일되게 되살려놓은 듯하다는 이야기다.
다시 기념탑 인근으로 화제를 돌려본다. 기념탑 인근에는 내장산 생태탐방원이 자리하고 있다. 뒷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숙박시설들이 삼각형 모양으로 줄지어 있다. 단층 뿐만 아니라 복층 숙소까지 잘 정비돼 있어 잠시 눈요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곳 건너에는 호수와 맞닿은 단풍생태공원이 자리해 가을에 방문하면 형형색색의 단풍들에 연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양사처럼 내장산 단풍 역시 전국적으로 유명해서다.

선운사 말사인 내소사 입구(좌),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공원이 조성 중인 황토현 전적지 전경.

100주년 기념탑을 왔다면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대한불교조계종 선운사 말사인 내장사다. 내장사는 기념탑으로부터 10분 안팎이면 도착한다. 진입로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보니 운전에 신경쓰이기 보다는 창밖 풍경들에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가로수 숲터널이 이곳만큼 완벽하게 갖춰진 곳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이동하는 내내 앙상한, 발가벗은 나무들의 행렬, 터널 숲길은 계속 이어졌다. 더욱이 양옆으로 내장산 고봉들이 에워싸고 있어 마치 골짜기를 한없이 이동하는 듯 착각에 빠진다. 푸르른 이파리와 꽃잎을 다 떨군 채 회색의 얼굴빛으로 겨울을 나고 있는 가로수들, 오히려 방전된 마음이 충전된다. 가로수들은 그 겨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채 서 있었다. 사람과 다른 점이 아닐까. 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일부 사람들은 욕망과 욕심으로 가득차 있지 않는가. 20여 년 만에 찾은 내장사가 이처럼 빼어난 풍경을 선사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떠나오기 전 도심지에는 눈 구경이 어려웠지만 이곳에서는 온통 설경이었다. 군데 군데 설경들은 운치를 더해줬다. 눈도, 숲 터널도 실컷 구경하고, 오길 잘했다
는 생각이다. 눈 밟을 때마다 나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얼마만인가. 뽀드득 소리가 유년시절로 안내한다. 늘 쫓기던 시간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산사는 그대로 설산을 품고 있었다. 바람도 없어 더욱 아늑하다. 다만 2021년 2월 방화로 전소된 대웅전은 여전히 중창되지 못했다.
큰법당이라고 쓰여진 미니 조립식 건물이 옛 영화의 자리임을 증언하고 있었다. 왠만하면 사찰은 사진 맛집이 많기 마련인데 정면 사진은 건질 게 없어 아쉬웠다. 측면으로 빠져나가 석탑을 끼고 전경을 담아야 했다.
사찰을 나와 정읍시내를 가로질러 20여 km를 이동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는 황토현 전적지를 찾았다. 워낙 터가 넓다보니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창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공원이 조성 공사 중이라 사진 몇 컷 담고 떠나올 밖에 없었다. 기념공원은 자리잡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기념공원 보다는 규모가 작더라도 확실한 콘텐츠를 구축하는 등 내실을 기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했다. 공원이 뭘 담아내려는지 아직은 알기 어려웠다. 역사적으로 숭고한 정신 계승은 물리적 규모에 좌우돼서는 안될 것이다. 조형물 ‘울림의 기둥’이라도 좋은 반응을 얻길 기대한다. 동학은 한낱 잊혀진 역사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우리들의 자존을 세워가는 일이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전봉준과 관련해 전해지는 민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녹두장수 울고간다’가 귀를 맴돌았다. 오늘, 동학으로부터 배운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