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에 무게 둔 대금 ‘청소리’ "우리가락 빛낼 것" [남도예술인] 대금 연주자 김형석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2022년 06월 09일(목) 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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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제108호=정채경기자)무대 양쪽에 대금 연주자와 첼리스트가 자리를 잡는다. 이윽고 이들이 들려주는 선율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시간 우거진 어느 숲 한가운데 서서 바람을 맞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시공간을 초월해서는 깊은 심연 속에서 빛을 찾는다.
대금과 첼로라니, 이들이 이룬 하모니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대금이 들려주는 부드러우면서 날렵한 음색이 묵직한 첼로 선율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일 터다.
이는 김형석 대금 연주회로 꾸려진 ‘제689회 목요열린국악한마당’ 첫 무대에서의 감흥이다. 공연의 첫 레퍼토리를 대금과 첼로의 듀오로 구성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무대를 보여줬다. 이날 울려퍼진 곡은 ‘바라밀다’로, 김형석 연주자의 부친인 김승일 조선대 음악학과 명예교수가 작곡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곡을 연주한 것이다. 이번 연주회가 남다르게 다가온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금 연주자 김형석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였다. 삶 곳곳에 음악이 깃들어 있었다는 의미다. 작곡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한 부친 덕분이다. 클래식이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다. 거실에 있던 그랜드피아노를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부친의 제자들이 찾아올 때면 작곡한 것을 고쳐주고 함께 연주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주 들어온 클래식과 달라서였을까. 그는 독특하게도 서양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우리 전통음악을 택한다. 대금 보다 먼저 단소로 전통 음악에 발을 들였는데, 집안의 반대나 서양음악을 권유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혼자 단소를 연주하면서 소리를 내보고 아리랑 민요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단소를 배우러 간 곳에서 본격적으로 대금 연주자의 길에 들어선다. 단소보다 대금이 소리내기가 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도전의식이 자극을 받은 영향이다. 그렇게 대금에 몰두한 끝에 그는 어렵지 않게 광주예고에 입학했다.
이 시기,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문화 소외 지역 학생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직접 아쟁을 배웠다고 한다. 어느 날 아쟁 연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그의 형이 아쟁 활을 쓱쓱 그어 본 것이 계기가 돼 아쟁을 전공하기에 이른다. 김상훈 서울시립관현악단 아쟁 수석이 그의 형이다. 형제가 전통음악 연주자인 것이다. 음악의 조예가 깊은 집임에 틀림없다.
이후 그는 추계예대에 진학, 조선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서용석류 대금산조는 고(故) 서용석, 심상남, 정회완 선생,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이용구 선생을 각각 사사했다. 대학시절부터는 김방현 선생에 대풍류 및 경, 서도 민요 반주에 관한 대금 연주법을, 최근에는 이용구 추계예대 교수에 대풍류와 전추산류 단소산조를 배웠다. 그는 국가중요문화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 보유자로, 조창훈 명인을 사사했다. 현재는 후학을 양성하며 소리나무국악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편견 없는 연주자’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듣기만 해도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 같은 이 말이 나아갈 길을 잃었을 때 이정표가 돼주는 듯 했다.
대금의 매력으로는 대금의 청소리(갈대청에 의한 소리)와 감정을 풀어헤치는 선율, 다양한 취법 활용이 용이해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은 점 등을 꼽았다. 크로스오버도 좋아하지만 특히 대금 연주곡들 중 조선시대 궁중음악인 정악에 절제미가 있어 즐긴다는 설명이다.
그는 대금이 주전공이지만 퉁소와 단소도 다룬다. 연주회에서 박종기류 대금산조를 퉁소로 연주하고, 단소에 빠져 단소산조를 무대에 올리는 것에서 나아가 단소 독주회를 열기도 해 단소로 독주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추산 전용선 선생이 단소산조를 처음 집대성한 것을 이용구 추계에대 교수가 다시 틀을 만들었고 이어 그가 사사했다. 앞으로 그는 전통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대금과 함께 퉁소, 단소 연주에 좀 더 매달릴 복안이다. 체력 소모가 크거나 음계가 한정적이고, 활용도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단점을 보완하는 악기 개량이 더디고, 그만큼 그 악기의 선율을 듣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에 한 결정이다.
아울러 그는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생각도 들려줬다.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통에 중심을 두고, 전통이 전통답게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만 새로운 창작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악을 어렸을 적부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한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30여 년간 전통음악에 매달렸더니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죠. 예전에는 서양음악을 하면 국악보다 신분의 격차가 높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알아보니 초등교육이 잘못됐다는 결론에 다다랐죠. 몇년 전부터 TV프로를 통해 국악과 크로스오버 등이 인기를 끌면서 국악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전통에 중점을 둬야 하는데 안타깝죠.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어린 시절부터 우리 음악을 가르쳐야 아이들이 커서도 국악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그도 늘 연주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산다. 정답도, 오답도 없기에 음악이라는 큰 바다에서 어디를 향해 가야할 지 막힐 때가 있어서다.
"30여 년간 대금을 연주하다 보니 고민이 깊죠.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답이 정해진 게 아니어서 알 듯 하면 모르겠고, 모르면서도 알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이 참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은 지 묻는 질문에 그는 얼른 좋은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유연한 사고를 하며 우리 음악과 함께 발전하고픈 마음을 간직한 채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진정성있는 연주를 할 계획이다.
대금과 첼로라니, 이들이 이룬 하모니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대금이 들려주는 부드러우면서 날렵한 음색이 묵직한 첼로 선율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일 터다.
이는 김형석 대금 연주회로 꾸려진 ‘제689회 목요열린국악한마당’ 첫 무대에서의 감흥이다. 공연의 첫 레퍼토리를 대금과 첼로의 듀오로 구성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무대를 보여줬다. 이날 울려퍼진 곡은 ‘바라밀다’로, 김형석 연주자의 부친인 김승일 조선대 음악학과 명예교수가 작곡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곡을 연주한 것이다. 이번 연주회가 남다르게 다가온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금 연주자 김형석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였다. 삶 곳곳에 음악이 깃들어 있었다는 의미다. 작곡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한 부친 덕분이다. 클래식이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다. 거실에 있던 그랜드피아노를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부친의 제자들이 찾아올 때면 작곡한 것을 고쳐주고 함께 연주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주 들어온 클래식과 달라서였을까. 그는 독특하게도 서양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우리 전통음악을 택한다. 대금 보다 먼저 단소로 전통 음악에 발을 들였는데, 집안의 반대나 서양음악을 권유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혼자 단소를 연주하면서 소리를 내보고 아리랑 민요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단소를 배우러 간 곳에서 본격적으로 대금 연주자의 길에 들어선다. 단소보다 대금이 소리내기가 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도전의식이 자극을 받은 영향이다. 그렇게 대금에 몰두한 끝에 그는 어렵지 않게 광주예고에 입학했다.
이 시기,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문화 소외 지역 학생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직접 아쟁을 배웠다고 한다. 어느 날 아쟁 연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그의 형이 아쟁 활을 쓱쓱 그어 본 것이 계기가 돼 아쟁을 전공하기에 이른다. 김상훈 서울시립관현악단 아쟁 수석이 그의 형이다. 형제가 전통음악 연주자인 것이다. 음악의 조예가 깊은 집임에 틀림없다.
이후 그는 추계예대에 진학, 조선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서용석류 대금산조는 고(故) 서용석, 심상남, 정회완 선생,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이용구 선생을 각각 사사했다. 대학시절부터는 김방현 선생에 대풍류 및 경, 서도 민요 반주에 관한 대금 연주법을, 최근에는 이용구 추계예대 교수에 대풍류와 전추산류 단소산조를 배웠다. 그는 국가중요문화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 보유자로, 조창훈 명인을 사사했다. 현재는 후학을 양성하며 소리나무국악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편견 없는 연주자’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듣기만 해도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 같은 이 말이 나아갈 길을 잃었을 때 이정표가 돼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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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의 매력으로는 대금의 청소리(갈대청에 의한 소리)와 감정을 풀어헤치는 선율, 다양한 취법 활용이 용이해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은 점 등을 꼽았다. 크로스오버도 좋아하지만 특히 대금 연주곡들 중 조선시대 궁중음악인 정악에 절제미가 있어 즐긴다는 설명이다.
그는 대금이 주전공이지만 퉁소와 단소도 다룬다. 연주회에서 박종기류 대금산조를 퉁소로 연주하고, 단소에 빠져 단소산조를 무대에 올리는 것에서 나아가 단소 독주회를 열기도 해 단소로 독주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추산 전용선 선생이 단소산조를 처음 집대성한 것을 이용구 추계에대 교수가 다시 틀을 만들었고 이어 그가 사사했다. 앞으로 그는 전통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대금과 함께 퉁소, 단소 연주에 좀 더 매달릴 복안이다. 체력 소모가 크거나 음계가 한정적이고, 활용도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단점을 보완하는 악기 개량이 더디고, 그만큼 그 악기의 선율을 듣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에 한 결정이다.
아울러 그는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생각도 들려줬다.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통에 중심을 두고, 전통이 전통답게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만 새로운 창작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악을 어렸을 적부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한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30여 년간 전통음악에 매달렸더니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죠. 예전에는 서양음악을 하면 국악보다 신분의 격차가 높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알아보니 초등교육이 잘못됐다는 결론에 다다랐죠. 몇년 전부터 TV프로를 통해 국악과 크로스오버 등이 인기를 끌면서 국악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전통에 중점을 둬야 하는데 안타깝죠.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어린 시절부터 우리 음악을 가르쳐야 아이들이 커서도 국악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그도 늘 연주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산다. 정답도, 오답도 없기에 음악이라는 큰 바다에서 어디를 향해 가야할 지 막힐 때가 있어서다.
"30여 년간 대금을 연주하다 보니 고민이 깊죠.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답이 정해진 게 아니어서 알 듯 하면 모르겠고, 모르면서도 알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이 참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은 지 묻는 질문에 그는 얼른 좋은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유연한 사고를 하며 우리 음악과 함께 발전하고픈 마음을 간직한 채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진정성있는 연주를 할 계획이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