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건축물은 자연의 일부…자연과의 조화가 중요하죠" 광주전남 유일 대목장 무형문화재 박영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
| 2016년 11월 02일(수) 1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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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평생 대목 일을 하며 대목장으로서의 외길을 걸어온 전남 순천 출생 박영곤(63)씨는 광주·전남 통틀어 유일한 대목장이자 지역에서 처음으로 대목장으로서 문화재 반열에 오른 주인공이다. 현재 그는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19호 기능보유자(2010년 2월16일지정 등록)다.
‘목수가 운명’이라는 그는 15세에 목수일에 뛰어들어 착실하게 일을 배운 뒤 24세때 ‘도편수’에 오를 정도로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편수는 목수로서 우두머리를 뜻한다. 도편수는 ‘도목수’ 혹은 ‘도목’ 등으로 불린다. 집 한채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된다.
15세때 목수일에 뛰어들게 된데는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편모슬하에서 여동생과 모친 등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그는 학교에 진학한다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더욱이 농사마저 없는 형편이어서 그는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외삼촌의 소개로 목수 일을 하게 된 그는 다행히도 초등학교 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목수 일을 하는 동안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간의 시간을 회고하며 지금이니까 집을 짓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고 들려준다.
"당시에 친구들은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는데 나는 망치를 들고 일해야 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벌어 생활해야 했지요. 나중에는 조금씩 여유도 생겨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50여년이나 지나와 버렸네요."
당시 외삼촌의 친구 한 분이 승보사찰 송광사를 맡고 있는 큰 목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안이나 설계 혹은 구성, 균형과 비례, 의장 효과 등 건축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들을 익히고 실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건축을 잘할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목수 일이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적성에 안 맞는 것도 아니라는 그의 손가락만 봐도 그가 얼마만큼 목수 일에 집중하며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웬만하면 손가락에 세 마디 손금이 있지만 그의 손가락에는 두마디밖에 손금이 없다. 유년시절부터 목수 일을 하다 보니까 새끼 손가락 손금 세마디 중 한마디가 두번째 마디로 밀려버린 것이다. 그만큼 그는 목수일을 연마하고 또 연마하는 과정을 치열하게 밟아왔다. 그는 이를 훈장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대목일은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고, 어깨너머로 배웠죠. 이것은 선생님(임채점)께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눈치로 배우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 은사님은 송광사 대웅전 등 큰절을 맡은 큰 목수셨지만 예순 언저리에 돌아가셔서 30여년동안 대목일을 했지만 저는 벌써 대목일을 한 지 50여년 안팎이 됐네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집안형편 때문에 온전하게 제도권 교육을 마칠 수 없었다. 그 어렵다던 설계도 역시 현장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깨쳤다. 처음에는 전문적인 설계도를 놓고, 그것을 따라 그리면서 실전감각을 끌어올렸다. 이 실전감각을 위해 그는 유리판밑에 전구를 켜놓고 손으로 베끼는 것부터 시작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연마하고서야 익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능적인 것이든, 뭐든 간에 손으로 하는 것은 10여년 하게 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가 도편수된 것도 9년만의 일이었다. 도편수가 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독립을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여기다 훗날 독학으로 컴퓨터 설계까지 마스터했다. 컴퓨터 설계 이전에는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종이에 설계도를 그려서 건축물을 올렸다. 그는 완성의 개념에 인색하다. 완성보다는 계속 보완해나가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다.
그에게 목재는 허투루버릴 것도, 여길 것도 없어 보였다. 이 목재 하나 하나가 집의 근간이 되어서다. 대목장은 이를 균형과 비례로 구성해 나간다.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시각적으로 비례나 균형이 잘 맞아야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집이 커 보(堡)가 길면 위의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하니까 대들보가 강해야 하지요. 이처럼 목재 하나 하나가 다 의미가 있고, 역할이 있어요. 주변 부재들과 구성이나 시각, 하중에 관한한 합리적 이유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그는 건축물이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데 고개를 조아린다.
"건축물에는 처마나 곡선, 물매(지붕의 경사)가 있는데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의 지붕의 물매 경사는 세고, 건물의 규모가 커도 물매 경사가 세어지지만 자연과 조화돼야 하지요. 지붕은 무엇보다 주변의 산 등 환경과 조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특히 한옥 등 한국 건축물은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자연과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송광사에서 대목으로서의 1막을 연 그는 법보사찰 해인사와 횟수로 20여년이라는 긴 인연을 이어가며 대목장으로서의 삶 2막을 열어젖혔다.
스물아홉살부터 해인사를 드나들며 거의 1년에 한채씩 지었다. 날마다 출, 퇴근을 한 것이 아니라 공사현장에 머무는 등 한달에 한번 집에 오며 작업장에 살아야 했다. 처음에 와공(瓦工)의 소개로 삼선암 칠성각을 지은 것이 인연이 됐다. 해인사에서 자그만치 그의 손을 거쳐간 건축물만 20여채에 이를 정도이니 해인사와 인연을 떼려야 뗄 수 없다.
요새는 예전만큼 그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건축물이 많지 않다. 1년에 1채 정도씩 작업을 하는 정도다. 생활에 도움이 되지않는, 턱없이 부족한 일감이다. 대목장으로서의 현실적 삶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손때가 해인사에만 묻은 것은 아니다. 서울 정릉 경국사 극락보전을 비롯해 나주 다도 불회사 및 문흥사, 봉황 미륵사, 속리산 법주사 탈골암(10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소재 성철 대종사 생가, 화순 유마사(6채), 미암일기 유물관, 영암 신북 류재운 가옥, 담양 용면 분통리 강동원 가옥 등 그의 손을 거쳐간 건축물은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분포해 있다.
전남대 바이오하우징연구단이 개설한 한옥 캠프에서도 강의한 바 있는 그는 ‘스님보다 더 스님처럼 산다’는 평가를 받는 가운데 작업장이 있는 담양군 창평면 광덕리 새(鳥)고개와 살림집이 있는 봉산면 기곡리, 아내의 일터가 있는 광주 첨단지구를 오가며 분주한 일상을 꾸려간다. 살림집은 그가 설계도를 그려 직접 지은 집이라 애착이 더한다. 1년에 한차례 무형문화재전을 여는 한편, 맥을 잇기 위한 전수생 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이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외로 단출한 답변이 돌아왔다.
"건물을 지어놓으면 한 100∼200년은 가지요. 저는 여기서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작품전시관이 하나 있으면 좋겠죠. 그러나 모형 전시가 아니라 실제 지어놓은 건축물이 예술작품이 아니겠습니까. 제 꿈이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외에는 아직 구체적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대목장 박영곤은
△1954년 전남 승주 출생 △1968년부터 임채점 대목장에게 기술배움 △2010년 광주시무형문화재 제19호 대목장 지정 △1992~93년 해인사 백련암 고심원, 해인사 약수암 죽림선원 △1995~96년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1993년 해인사 삼선암 우소림 선원, 속리산 법주사 대휴선원 △1998년 성철스님 생가 복원 △1989년 서울 경국사 극락보전 △1999~03년 나주 불회사 일주문, 대양루, 사운당, 비로선원 △2003년 화순 유마사 육화료 강원 △2003~04년 나주 봉황 미륵사 만세루 △2007~08년 미암일기 유품전시실 외 다수 △2011~12년 영암 신북 모산 민가 △2012년 담양 미암일기 고직사 △2012년 나주 다도 불회사 극락전 △2013년 담양 용면 용연리 민가.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사진=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2026.10.24 (토) 11: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