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에 벌어진 ‘국악판’…그 흥에 살았죠" 남도명인 김영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인간문화재 박세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 |
| 2017년 07월 26일(수) 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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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간문화재는 예인으로서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다. 평생 한 길을 걷는 이들 중에서도 선택 받은 이들이니,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란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자연인이 국가가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 그 타이틀을 얻기까지 그 사이 사이의 삶들은 어땠을까.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을까.
김영재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 예능보유자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그는 소리를 빚어내는 사람이다. 줄을 뜯고 누르고 튕겨내면서 소리를 ‘빚어내는 것’이 그가 반백년을 넘게 해 온 일이다.
‘빚어낸다’는 것. 국악기 연주가 서양 악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어떤 논리가 통한다기 보다는, 연주자의 내공이고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손끝의 감각에 달려있다.
"서양 악기가 정확한 음계로서 정돈된 선율을 들려준다면, 국악기는 어떤 ‘맛’을 보게 해주는 것이죠. 바람 소리, 새 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소리’라고 표현하듯 우리 국악은 판소리, 거문고 소리, 장구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의 소리라고 여기는 것이죠. 바로 전통 국악만이 낼 수 있는 ‘맛’ 때문 아니겠어요?"
김 명인이 그 ‘맛’을 알게 된 때는 바로 열네 살 때다. 그가 살던 합정동 근처에는 굿판이 자주 열렸다. 굿판을 마주한 소년의 마음은 알 수 없는 흥분이 들끓었고, 그 안에서 함께 하고 싶은 열망이 타올랐다. 그는 그것을 "내 안의 잠재돼 있던 ‘신명’을 건드려준 사건"이라 기억한다.
김 명인이 국악계에 발을 들인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늘 국악과 친했다. 굳이 찾아 들으려 하지 않아도, 지금의 대중음악처럼 국악은 우리네 삶과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보고 들을 것이 많이 없던 때죠. 그래서 오히려 일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렇게 반갑더라고요. 마을 잔칫날 울려 퍼지는 풍물소리며 굿하는 소리며 또 상여 나가는 소리까지. 전통 국악이 일상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었어요."
일상 속에서 즐기는 국악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냥 좋아만 한 것이 아니라 예인으로서의 끼도 넘쳤다. 소리도 곧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악기도 잘 다뤘던 그다. 집안에서는 ‘왜 하필 남자가 국악을 하느냐’고 반대도 하고, 다른 직업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김 명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그가 그토록 바라던 ‘국악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국악예술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당시만 해도 재계·언론에서 전통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터라, 장학제도가 아주 잘 돼 있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공 학교로 진학 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학교에는 김천흥, 신쾌동, 지영희, 성금연, 박초월, 이창배, 전사섭 등 당대 쟁쟁한 국악 명인들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특히 전공 악기 하나만 공부하는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는 가락을 알아야 춤도 추고 악기도 잘 다룬다하여, 모든 장르를 섭렵하게 했다.
그는 거문고와 해금을 배웠다. 남성적이고 웅혼한 매력의 거문고부터 여성스럽고 서정적인 선율의 해금까지 음양(陰陽)을 아우르는 그의 폭 넓은 연주 소리는 이 선택의 영향이다.
"거문고는 음양이 아주 분명한 소리를 내요. 음성·양성 소리가 정확한데, 이 둘이 주고받는 앙상블이 굉장히 아름답죠. 반면 해금은 애잔해요. 동양의 바이올린이라고도 하는데, 정말 가녀린 소리가 나죠. 때문에 우리나라 정서를 잘 나타내줍니다."
거문고는 신쾌동 명인에게, 해금은 지영희 명인을 사사했다. 이 뿐 아니라 성금연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한명숙 명인에게서 무용을 배웠다. 그가 악기 연주 도중 흥에 겨워 일어나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만능 예인’, ‘영재 예인’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서울토박이인 그가 남도와 연을 맺은 것은 이 같은 스승들 덕이다. 그의 거문고 스승인 신쾌동 선생을 비롯해 당시 국악인들은 남도 출신이거나 남도음악을 공부하신 국악의 대가들이었던 것이다. 고향은 서울이지만 그의 예술적 향기가 남도 색이 짙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김 명인은 전남대 예술대학 국악과에서 15년을 근무했다. 1회 졸업생들이 배출되자, 그가 또 할 일이 생겼다. 제자들이 마음껏 국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판을 짜는 일이었다. 지난해로 창단 30주년을 맞은 전남도립국악단은 남도 국악 예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모았던 김 명인과 남도 예인들이 함께 이뤄낸 성과다.
"남도 스승님들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으니, 남도는 예술적 고향이나 마찬가지죠. 저와 함께 성장해 온 국악인들, 그리고 제자들이 커서 교수도 되고, 훌륭한 명인이 돼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가장 뿌듯해요."
김 명인은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를 잇는다. 신쾌동 선생의 수제자로 이름을 올렸고 2013년 1월 14일에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그가 보존·계승하고 있는 신쾌동류는 백낙준의 산조에다 중중모리와 휘모리 두 악장을 새로 짜 넣은 것이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휘모리 총 여섯 악장으로 짜여진 것이 특징이다. 담담하고 꿋꿋한 소리와 구슬프고 애절한 느낌의 계면조의 넘나듦이 매력적이다.
김 명인은 스승 신쾌동 명인에게서 ‘소리를 빚는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스승의 손을 보면서 흉내를 냈고, 음절마다 흔들어서 빚는 소리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국악 연주자들은 완벽한 소리를 내기 위한 그 과정에 있다고 단언한다. 정확한 ‘음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자랄 것 없는 완벽한 연주는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완벽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독공’하는 수밖에 없다 한다.
"판소리에서 소리를 얻는 것을 ‘득음’이라 하죠. 목에서 피가 맺히도록 지르고, 품고, 또 소리치고요. 국악기 연주도 마찬가지에요. 어느 정도의 힘으로 술대를 누를지, 얼마만큼 떨리게 할지, 어떻게 튕길지, 이 모든 것의 결정체로서 소리가 빚어지는 것이거든요."
줄을 튕겨 ‘빚은 소리’를 내기까지 그의 손가락은 몇 번이고 터졌다. 술대를 잡은 손은 피부가 벗겨졌고, 그 쓰라린 손으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힘의 원동력이 돼 준 것을 그는 아버지 같았던 스승님 덕이라 한다.
"고된 길이었어요. 14살에 입문해 한 길을 걷기까지 체력적으로, 심적으로도 힘들었죠. 그럴 때 마다 스승님은 부르트고 아픈 손가락을 만져주셨어요. 정말로 따뜻한 정을 많이 나눠 주셨었죠.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평생 외길을 걸어오면서 그가 남긴 ‘기록’들도 빛이 난다. 그는 1991년 ‘김영재 해금작품집’을 시작으로 해금·거문고 창작곡을 음반으로 발매했다. 그것들이 100종이 넘는다. 특히 국악인생 40주년을 맞은 2002년부터 5년마다, 그의 예술 세계를 오롯이 담은 음반을 세상에 내놓았다. 언제고 명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오랜 팬들은 안도감을 느낄 터다.
그에게 앞으로 꿈을 묻자, "전통국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면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국악의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 세상이 변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도,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 때만이라도 전통 예술을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전통 국악은 우리의 뿌리거든요. 과거 삶 속에 자연스레 함께 했던 게 국악이었듯 옛 사람들의 정서, 삶,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죠. 이미 지나간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란 편견 없이 전통예술의 매력에 많은 사람들이 흠뻑 취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2026.10.24 (토) 11: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