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길’로 난 음악인생 남도로 通했네 [아트공감] 배창희 남부대학교 실용음악학과 교수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19년 02월 21일(목) 1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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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듯 꼼꼼히 기록했다.
그의 음악노트이자, 지난 시절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인생노트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작곡 배창희’란 명함을 달고 세상에 나온 곡이 1000개가 넘는다. ‘바위섬’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만 소개하기엔 아쉬운, 배창희 남부대 음악학과 교수의 이야기다.
배창희 그의 음악 인생은 늘 ‘갓길’로 통해 있었다.
정식으로는 한 번도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다.
어렸을 적엔 삼촌의 기타 연주를 어깨너머로 배웠고, 학창시절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 머물며 독학을 했다. 흔한 학원 한 번 다니지 못했다. 집에서 그가 음악하는 것을 반대하셨던 탓이다. ‘딴따라는 절대 안 된다’던 그 시절의 논리대로였다.
"아버지가 한약방을 운영하셨어요. 늘 책과 가까이 지내시던 양반이셨죠. 그러니 아들이 그 뒤를 이어 한의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한보리씨가 우리 큰 형님이예요. 장남은 일찌감치 아버지의 바람을 져버렸으니, 저 만이라도 음악이 아닌 공부를 하길 바라셨죠. 때문에 음악 학원을 다닌다거나 레슨을 받는다거나 하는 지원을 바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했죠."
집안의 반대와는 무관하게, 배 교수는 음악선생들이 늘 욕심을 내는 제자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성악 반에 들 것을 권유받았는데, "음악 할 거면 집을 나가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하고픈 것을 못하게 되면 모난 마음이 생길법도 한데 그는 그저 허허 웃으며 털어버렸다. 대신 그는 친구들과 모의해 남성 6인조 ‘어린양 중창단’을 꾸려 활동을 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선배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친구들과 무대에서 노래했어요. 그러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교내 밴드부에서였어요. 정식 밴드부원은 아니었는데 선배들이 저를 정말 예뻐해 줬어요. 틈만 나면 연습실로 내려와서 함께 어울렸죠. 그때 브라스 악기의 소리내는 방법과 음계를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늘 일기 쓰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일기라기보다는 에세이와 같은 작문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 한정 없이 걷기도 했고, 외딴 곳에 앉아서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이렇게 적힌 글들은 대부분 노랫말로 쓰였다. ‘사랑하는 마음은 신들의 마음이다/ 이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등 외사랑의 기록도 눈에 띈다. 일기장을 열 때 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거의 다 상상에서 나온 가사들이었어요. 중고등학생 남자가 세상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저 그때 느낀 감정들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 얻어낸 이야기들을 기록했죠. 볼 때 마다 신기해요. 1977년 그날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싶어서요."
그만의 음악 인생은 대학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음대 진학을 꿈꿨지만 현실은 그를 조선대 금속과로 이끌었다. 당시 광양에 포스코가 들어설 때 즈음이어서 공대가 인기였던 때다. 아버지 뜻에 따랐지만 대학에 들어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합창단에 들어간 것이었다.
"제 방식대로 꾸준히 음악의 길을 뚫은 거예요. 1학년 때부터 부지휘를 맡았고, 꾸준히 작곡도 했죠. 제가 만든 음악을 합창단 선후배들이 정말 좋아해줬어요."
그가 만든 여러 노래 중 ‘바위섬’은 합창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이었다. 그도 모르는 새 바위섬 악보가 만들어졌고, 캠퍼스에서 자주 불렸다. 대학생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기타를 잡았고, 당연하단 듯 바위섬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은연중에, 서서히, 입에서 입으로 바위섬이 퍼져 나간 것이다.
대학가에서 알음알음으로 불리던 ‘바위섬’이 앨범에 실린 것은 1985년이다. 그 시절 음악 좀 한다는 대학생들은 사직동에 있는 생맥주집 ‘사직골’로 몰려들었다. 대학생들이 밤새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아지트였던 셈이다.
"그때 당시 박문옥, 김정식, 신상균 등 기라성 같던 선배들이 ‘예향의 젊은 선율’이란 앨범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때 제 곡 ‘바위섬’과 ‘작은어부’가 함께 실리게 됐어요. 꿈같은 일이었죠. 늘 혼자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해왔지만 앨범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진짜 꿈같은 일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예향의 젊은 선율’의 B면 가장 끝 곡으로 실렸던 ‘바위섬’(노래 김원중)이 전국적으로 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가요제 입상 경력도 없는 노래가, 더군다나 지방에서 만들어진 곡이 출반 6개월도 채 안 돼 전국 가요 톱 리스트에 오른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위섬’을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생각했죠.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인적 없던 이곳에/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 들더니/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파도라네’ 노랫말이 80년 5월의 고립된 광주를 상징한다고요. 사실 노랫말만 본다면 오히려 서정적이예요. 다만 작품이란 게 시대상과 사회를 투영하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죠. 제작자로서 그것 또한 큰 기쁨이고요. 때문에 이에 대해 저는 한 번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은 적은 없어요. 그저 나는 광주 사람이고, 대학시절 80년 5월을 겪었던 사람이 라고 말할 뿐이죠."
앨범이 흥행을 하자, 서울로 올라와 함께 작업하자는 솔깃한 러브콜도 여럿 받았다. 그러나 배 교수는 광주를 택했다. 꼬두메 멤버들과 광주에서 창작 음악을 만들어 선보였다.
"음악 산업 자체가 중앙 쏠림이 심했기에 사실 지방에서는 경쟁력을 갖추기 참 어렵죠.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음악을 했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 디딤돌을 두었던 광주창작음악의 맥이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을 보면 그래도 ‘등불’ 역할은 하지 않았나 싶어 뿌듯합니다."
누구보다 그는 남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1년 6개월 영산강 실개천을 돌아다니며 ‘영산강’을 주제로 한 앨범을 내기도 했고, 무등산을 오르내리며 바라다 본 광주의 숨결을 곡으로 모아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다 창작국악단 ‘도드리’를 결성, 구수한 남도 소리를 얹어낸 국악곡 작업에도 몰두했다. 그가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남도를 기록한 결과물들이다.
이제 배 교수는 그만의 브랜드 작품을 완성하고 싶다.
누구라도 ‘아, 그 작품! 참 좋지’라고 기꺼이 말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하나 만들고 싶은 것.
"좋은 작가, 훌륭한 연출자를 만나서 멋진 뮤지컬을 하나 올리고 싶어요. ‘시집가던 날’이란 국악곡을 테마로 해년마다 두 곡씩 작곡을 했죠. 이를 뮤지컬로 엮어 내어 마무리를 짓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광주에서 일을 벌이고픈 마음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남도의 면면, 남도 사람들의 맛과 멋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2026.10.25 (일) 0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