옭아맸던 경계 없어지면서 시각이 열렸다

[창간 특집 남도예술인] 코로나19 여파 고향서 작업 서양화가 박소빈
2007년 뉴욕·2011년 중국 진출 이후 줄곧 해외서 활동 펼쳐
용과 여인 소재 연필 드로잉 해외서 관심…독창적 회화 구축
뉴욕 ‘엘가 위머 갤러리’ 초대전 뒤 3월부터 광주 머물며 작업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0년 07월 05일(일) 17:35
(2020년 7월호 제86호=고선주 기자) "내가 있는 곳이 현재이고, 집처럼 된 것이죠. 해외에 10년 넘게 있다보니 이방인이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제 거처이자 집이라는 생각이 앞서 들더군요. 제가 외국생활에 빨리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적응력이 남달랐던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7년 뉴욕 위머 갤러리 대표인 엘가와 기획자 겸 교수인 탈리아 브라초폴러스가 공동기획했던 미국 뉴욕 텐리갤러리 초대전은 그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첫 발판이 됐다. 어떤 화가들은 이를 더욱 발전의 계기로 삼지 못한 채 프로필에 해외전시라는 이력 한줄 늘리는데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어떤 작가는 그것을 계기로 작가로서 비약적 성장의 단추를 꿴다. 여기다 해외에서의 적응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앞선 멘트는 그가 얼마만큼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을 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10년이 넘는 해외생활은 그곳의 교포가 아닌 이상 지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도 이를 극복하며 국내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으로 올라섰다. 서양화가 박소빈씨의 이야기다. 박 작가는 광주 출생으로 처음에는 평범한 화가였다. 열심히 의지를 가지고 하는 젊은 작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오늘의 박소빈이라는 이름을 국내외 화단에 선명하게 새기기까지는 그만의 각고의 노력과 남들이 하지 않는 미술적 사고가 빚어낸 합작의 결과로 인식된다. 그를 대표하는 단어는 ‘용과 여인’, 그리고 ‘연필드로잉’이다. 이중 용은 동양적 사고를 표상하는 것이고, 연필 드로잉은 과거 한때 화단의 트렌드였다. 지금은 복고적 방식으로 치부된다.
이런 인식에도 그는 엄청난 공력이 요구되는 연필을 붓 대신 잡았다. 그의 작업 모습을 본 이들이라면 쌓여있는 연필 껍질 조각들과 수십자루 연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양이 엄청나서다. 이는 그가 해내는 작업의 양이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용은 어줍잖게 서양화랍시고 해외의 풍조나 기법을 쫓는 국내 화단에 경종을 울린 소재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고, 광주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 가장 부합한 소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일방적인 서양화단의 흐름을 신봉했다면 오늘의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박소빈만의 회화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그의 화가로서의 출발선상으로 돌아가 보면 그의 스승이었던 고 원동석 교수(목포대)로부터 입은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원 교수는 그에게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정립을 할 것을 주문했었다. 작가는 스스로 여기로부터 기인해 출발한 것이 한국적인 것이고, 정체성임을 알 수 있었다고 자인한다. 작가는 처음부터 한국적인 것을 찾아 나서고, 꾸준하게 사유해온 셈이다. 이렇게 해서 신화
와 상상력을 넓혀나갈 수 있었으며, 한때 모색에 어려움을 겪었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우리 것에 대한 추구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일부 미술계 안팎의 인사들에게 정확하게 반기를 들고, 우리 소재가 세계에 먹힐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 보인 장본인이다. 엘가나 탈리아가 그를 주목한 이유도 내용과 형식이 참신해서다. 광주가 국내 주류의 미술고장이 아님에도 그가 뉴욕 화단에 어필이 된 이유다.
그는 뉴욕 초대전을 자신의 프로필 한줄 늘리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도전을 감행했다. 뉴욕 초대전에
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엘가와 탈리아의 변함없는 지원 속에 점차 뉴욕 화단에 이름을 새기게 된다. 작가는 지난 2월25일부터 3월15일까지 뉴욕 첼시 26가의 ‘엘가 위머 갤러리’에서 성황리 초대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2007년, 2009년, 2013, 2014년에 이은 다섯번째이자 엘가와 탈리아가 손을 잡고 연 세번째 기획전이었다.
2014년 이후 6년만에 뉴욕 전시가 마련된 이면에는 이 시기에 그가 중국 화단에 힘을 쏟을 무렵이어서다. 박 작가의 중국과의 인연은 뉴욕 진출 4년 뒤인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11년에 광주시립미술관 북경창작센터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10년째 중국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시간들은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목표에 집중해 활동의 모든 초점을 거기에 맞췄다. 코로나19가 아니 었다면 그는 지금 중국이나 미국 뉴욕, 아니면 유럽 어디 쯤에 있을 터다.

코로나19 여파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올해 뉴욕 전시 이후 국내로 돌아와 머물고 있다. 지난 3월 뉴욕 초대전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거의 창고처럼 방치했던 광주작업실을 정리했다. 매일 그곳에 머물며 작업을 하고 작품 구상을 한다. 또 그동안 해외에 머무느라 소홀했던 국내 미술 전반의 일정들을 체크하며 보내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듯 했던 해외에서의 활동을 살피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해외활동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들로 광주라는 지역성을 탈피할 수 있었고, 화가에 대한 인식 정립, 그리고 문턱 없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과 소통하고 작품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활동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를 경계 없음으로 표현한다. 그를 옭아맸던 경계가 없어졌다고 한다. 2009년 무렵 카카오나 페이스북 등이 막 시작하는 단계여서 그곳의 예술가들과 직접 대면하고 소통하는 게 좋았다는 술회다. 뉴욕 진출은 작가에게 고대하던 무대가 열린 것이자 시각이 열린 것으로, 그에게는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었다. 이것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현지의 세계적 작가들을 보면서 좀더 프로페셔널한 마
인드를 가질 수 있었고, 작가적 성숙과 겸손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작가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희소성있는 작가들을 두루 만나게 되면서 저 역시 좋은 영향들을 받았죠. 제 위치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됐으며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 있었더라면 저만의 연필드로잉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광주에 계속 있었으면 제 희소성을 몰랐을 것 같아요."
광주에서 이같은 생각들을 모두 되새기고 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들을 못했을 수도 있다. 코로나19는 그에게 여러 생각을 안겨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코로나19로 인해 강제된 광주에서의 체류는 처음에는 고향이지만 어색했을 정도였다고 밝힌다. 그만큼 해외생활이 길었던 탓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는 광주에서 새로운 작품 구상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평화와 자연, 바람, 자유라는 주제를 끄집어내고 있다. 자신에게 이들 주제가 다가왔다는 설명이다. 사람과 하늘, 물, 공기에 관한 것들을 추상적으로 다뤄볼 심산이다. 그가 줄곧 다뤄왔던 신화적 접근이 또 다른 자연으로 분화될 조짐이다. 그에게 지금의 시간들을 물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고 싶은 제 바람대로 그냥 그리고 싶어요. 국내에 있는 시간이 또 다른 행복의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맞죠. 그동안 제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움츠려 있었거든요. 이를 털어내고 또 다시 펼쳐나 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긍정적 연유로 그는 새로운 작업 동력을 마련해가고 있는 듯하다. 해외에서 작업한 신작들과 북경 금일미술관 전시 당시 퍼포먼스했던 작품을 다큐영상으로 담았는데 추후 여력이 되면 이 지역에서 내년께 선보일 생각을 가지고 있고, 동판 작업 역시 진행 중이다. 동판 작업 외에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작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상이나 동판은 그가 2000년에 접어들면서 시도했던 것으로 오랜 해외 체류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장르들이다. 그의 고향에서의 시간은 쓰지 않다. 달게 느껴지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려 하고 있다. 현재 그는 드로잉 컬러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지 못했는데 오랫만에 광주 작업실에서 스케치를 하면서 대작 작업을 진행 중이에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기로도 봐요. 밀린 책들을 읽고 있고, 광주 화단의 관계자들과 미팅을 갖고 있죠. 내년 전시 일정과 관련해 몇몇 미술관계자들과 미팅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해외의 박소빈과 국내의 박소빈에 대한 차이를 묻자 이해하기 쉽도록 세세하게 답했다. 해외에서는 너무 당당하다. 희소성도 그렇고, 신뢰와 검증이 냉철한 가운데 소통을 위한 열정, 저만의 드로잉 방식 때문에 당당해졌다는 것이다. ‘그리다’는 개념에 연필은 부합, 최고의 재료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어 광주는 가장 편안한 가운데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태어나서 세번의 이사를 했다. 태어난 백운동에서 옛 태평극장 인근, 그리고 18세 때부터 살아온 학운동이었
다. 40년 동안 무등산의 안온한 품을 느끼며 살아온 것이다. 변함이 없는 그의 명제는 ‘자신에게 광주가 가장 많은 것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해외에 10년 넘게 체류하며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자신의 작업기반이 됐던 곳이 광주였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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