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그림이 정신적 풍요 추구하는 데 도움 됐으면"

아트인(한국화가 조문현)심산유곡의 산수 풍경 따라 그리며 화가의 꿈 키워
‘명상’ 주제 15년째 달항아리 작업, 전통 정서 투영
"미술 한길 가는 것이 중요…회화사 발전에 일조를"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0년 12월 28일(월) 15:52

(2021년 1월호 제92호=글 고선주 기자)

달항아리는 전통문화 소재 중 단순미와 절제미의 대표 명사가 아닐까 싶다. 달항아리는 순백색의 단순하며 넉넉한 느낌의 도자기로, 달과 닮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즐겨 내세웠던 비움과 채움의 사유들이 투영돼 우리 고유의 여백미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흰색의 달항아리는 민족의 색으로 일컬어지는 백색이 갖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그의 화폭에는 온통 은은한 전통미가 넘쳐난다. 더욱이 그는 수염을 기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자리잡았다. 수염 때문인지 그와 달항아리는 너무 잘 어울린다. 마치 그가 달항아리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달항아리 하면 떠오르는 한국화가 조문현씨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달항아리는 전통 소재를 다루는 화가들에게는 단골 소재 중 하나다. 그만큼 차별화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자신만의 붓칠과 언어를 가지고 그림을 빚는 것처럼 고도의 집중력과 사유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보이는 그의 화폭에는 온통 달항아리가 있는 풍경이 넘실댄다. 지난 12월5일 오후 북구 두암동 소재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현재까지 회화세계를 들어볼 수 있었다.
조 작가는 전남 화순 이양에서 자랐다. 시골이다보니 종이가 넉넉하지 않아 그림 한번 속시원하게 그려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그림이 마냥 좋았다. 그릴 데를 찾다가 눈에 보이지 않자 문풍지에 그렸다. 먹물로 그럴싸하게 그려 제꼈다고 한다. 그런 그림들이 어린 마음에 너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옛날 달력에 많았던 심산유곡의 산수 풍경을 따라 그리곤 했다. 가르쳐줄 선생도 있을리 만무한 시골에서의 유일한 선생은 달력 안 산수 그림들이었다. 말이 없는 스승이었지만 늘 마음에 와 콕 박혔다. 마음에 박힌 것들은 당최 빼내기 어렵듯, 그에게 화가로서의 꿈을 단 한번도 접을 생각을 하지 않게 한 지주(支柱) 혹은 심지(心志) 같은 것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는 혼자 그림을 열심히 연마하다 보니 물 조절까지 가능하게 됐다고 술회한다. 다만 그는 그 당시의 그림을 남겨놓지 못해 아쉽다는 반응이다. 사실 그의 집안은 예술과는 그닥 인연이 없었다. 부친이 흥이 있어 노래를 좋아하고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훗날 그의 아우가 사진을 전공했지만 그가 예술가로 성장해 활동을 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예술가의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는 광주 인성고에 진학해 미술부 활동을 벌였고, 이를 발판으로 미술대학 진학을 굳힐 수가 있었다. 유년기 때부터 꿈꿔온 화가의 첫 단추가 꿰어진 셈이다. 물론 자신의 화풍을 고민하기 시작하던 때는 대학 졸업 후의 일이다.



"대학 때는 일상적으로 하는 것들을 했죠. 한국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먹 작업 같은 것에 집중하며 보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먹 작업이나 채색그리고 재료구현에 관한 생각에 집착하지는 않았거든요. 다만 저만의 세계를 어떻게 구축할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 않았나 싶죠. 또 이 무렵 자연 현상 등 일상을 그렸지, 저만의 뚜렷한 방향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러다 자신의 최종 지향점처럼 다가온 것이 달항아리다. 달항아리로 작업을 한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그는 달항아리의 완결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달항아리를 자신에 맞는 옷처럼 만들기 위해 오랜 고민 끝에 관련 도서 등 여러 자료들을 섭렵해야 했다. 그는 우선 달항아리가 가장 한국적이고, 우리 민족의 선경이라는 점, 백의민족, 아울러 어머니의 품속을 상징화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한국도자문화의 대표 표상이 달항아리라고 밝힌다. 그는 달항아리를 보면 누구나 편안한 느낌을 갖는 등 한국적 정서를 함유하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우리 민족에게 깊고, 크고, 넓다는 의미의 ‘한’ 사상을 포용하고 있는 것 역시 달항아리로 인식한다. 무소유 또한 달항아리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무소유의 의미를 아예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여백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서양에서는 평면에 100%를 다 채우지만 한국에서는 비워둔다. 그에 따르면 여백 또한 그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화 여백은 보는 그림이 아니라 보아가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오한 마음의 투영이라고나 할까요. 명상이나 사유의 정신이 달항아리이겠죠."
오늘날 그의 달항아리는 그만의 색깔이 투영돼 있지만 2009년 달항아리로 첫 전시를 열 무렵 그는 고려청자도 작업을 했다. 되도록이면 달항아리와 연계된 것들을 모색하다가 전래동화나 속담을 더해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한국적인 것을 승화하고픈 마음에서다. 그의 화폭에는 노장사상이 만드는 무위자연과 집, 꽃, 새 등이 등장한다. 집은 대개 오두막 형태로 나타나는데 힌두교도들이 수행하며 거주하는 곳을 지칭하는 아시람(ashram) 같은 의미였다. 좀 익숙한 말로는 명상센터나 안식처 같은 곳의 다른 이름일 듯 싶다. 꽃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도지화(道之華)로, 한송이 꽃을 피기까지는 뿌리에 근원이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뿌리가 있으면 가지가 있고, 줄기가 있으며 꽃이 있는데 꽃만 볼 것이 아니라 뿌리의 근원을 보라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화면 속 꽃에서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까지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기다 해까지 달항아리 화폭 속에서 반추한다. 해는 양이고, 달항아리는 달이니까 음이라는 그는 음양의 조화까지 언급한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이라고 하는 음양오행 사상이 동양 사상의 근원으로, 이런 내용들을 가감없이 반영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줄곧 보고 있노라면 그냥 그림을 그렸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그는 그냥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 30대 때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그가 사상적 고민을 얼마나 했는가를 직감할 수 있는 대목은 많다. 이를테면 장성 백양사 경내 ‘이 뭣고’ 탑비는 그에게 일관된 회화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 탑비의 화두인 나‘는 누구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책을 구해 보면서 명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그림을 해올 수 있었다. 이때 그는 한지와 유화, 나이프, 아크릴이라고 하는 소재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후 테마는 명상을 유지한 채 컬러로 화폭을 일구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화가를 언급한다.화가는 좋아해서 선택을 했고, 일념도 있었단다. 대학을 졸업 후 미술로 당연히 밥을 벌어먹고 살겠지 했는데 너무 막연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버팅겼다. 다소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화가의 길을 단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림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라고 들려준다.
그는 마지막으로 화가로서의 평가와 계획에 대해 언급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화가들 누구나의 꿈처럼 붓을 놓지 않고 미술 한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입니다. 미력하겠지만 제 작품으로 현대 회화사 발전에 일조하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죠. 현재까지 해왔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달항아리를 연구하는 동시에 물질만능의 팽배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물질과 정신의 조화가 중요한 만큼 제 그림이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거든요."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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