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 널리 알리며 다구 전통적으로 바꾸는데 최선"

신문화탐색(‘무안분청’ 한길 도예가 김문호)
도예 입문 41년째 윤광조 선생 문하서 사사 도자 공부
월선리 정착하며 작업 활발하게 전개 해외전시 꾸준
"작가는 새로운 것 보여줘야 할 의무·책임감 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2월 25일(목) 18:14
(2021년 3월호 제94호=글 고선주 기자)
그는 광주에서 막 전시를 끝낸 뒤라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1월21일부터 2월3일까지 무등갤러리에서 분청 개인전을 열었기 때문이다. 폐막한 후 이틀만에 필자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2월5일 오후 거의 목포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그의 작업실은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예술촌에 자리하고 있다. 목포 인터체인지를 지나 일로 IC를 통해 들고 날 수 있는 곳이다. 늘 한적한 농촌의 작업실을 찾아갈 때면 헤매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촌 마을 표지석까지는 잘 찾아갔지만 진입해서가 문제였다. 단박에 작업실을 찾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구불 구불한 시골길에서는 왠지 헤매는 것마저 여유롭고 운치있게 다가온다. 전화통화를 했건만 다시 한번 지나친다. 또 통화를 한 끝에 마중나와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도예 입문 41년째에 접어든 가운데 ‘무안 분청’ 한길을 걷고 있는 도예가 김문호씨의 이야기다.
그가 도예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포 문태고등학교 재학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난 뒤 그의 관심은 도자 쪽으로 기울었다. 과제를 내 줬는데 초벌구이 된 항아리에 ‘낙화’라는 명제의 그림을 그려 가져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잘 했다고 칭찬을 해줬다. 그것이 계기가 됐다. 그후 기초적인 공부를 하던 그는 24세 때인 1981년 생계 유지를 위해 제약회사에 입사하기로 했으나 그 일주일 전 보따리를 싸 몽탄으로 가 3, 4개월간 머물며 몽탄요를 접한다. 몽탄요를 접한 뒤 경주로 이동해 ‘사등이요’를 익힌다. 사등이요를 접한 뒤 스승인 함남 함흥 출생 도예가이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던 윤광조 선생의 문하로 들어간다. 봉급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들어가다보니 윤광조 선생이 유명한 분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는 설명이다. 선생님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웬만한 제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지만 그는 1년 반 정도를 보내며 도자 공부를 했다.
전국을 돌며 도자공부를 지속했다. 그러다보니 대학 진학은 남들 다 졸업할 무렵 입학해 뒤늦게 조소를 전공했다. 그후 그는 무안군 소유 주택을 매입해 터를 잡게 된다. 터는 320평 규모로, 그곳에 가마를 갖췄다. 기름 가마와 장작가마, 가스가마가 있지만 그는 장작가마를 택한 듯 보였다. 그가 별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가마 옆으로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다.
무안과는 아무런 연이 없었지만 작업장 때문에 월선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돈이 없고 하던 때라 비싼 곳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에게도 해외 진출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주에서 도자기를 1년 동안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집사람과 부모의 반대로 호주행을 접게 된다.
그래서 그의 월선리 정착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착까지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1개 시와 3개 군이 함께 사용할 광역소각장이 월선리 입구에 추진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지 투쟁에 나서는 등 그들과 함께 했다. 결국 소각장은 들어서지 않았다. 이처럼 마을 일을 피하지 않고 임할 정도로 그는 마을 일에 열심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던가. 그후 행복마을로 지정되고 사람들이 마을로 전입해 들어왔으며 한옥촌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마을 일을 하면서 그는 무릉도원 도화촌을 꿈꿨었다. 살구와 복숭아 그리고 회화나무를 심었지만 다 뽑히고 없는 일로 돼 버렸다.
지금은 일상에 충실하게 임하며 작업을 펼친다. 목포대 평생교육원 등에 10년 넘게 도자선생으로 출강했다. 지금은 후배에게 넘겨주고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작업에 매진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도 깊이를 더하게 된다. 독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 전속작가가 되면서 해외진출을 이뤘고, 영국에는 제자로 2012년 영국 왕립원예학회(Royal Horticultural Society)에서 주최한 세계 최고의 정원 박람회 첼시플라워쇼(Chelsea Flower Show 2012 in London, UK)에서 회장상(전체 최고상) 초대 수상 기록 및 쇼가든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던 황지혜씨가 다리를 놓으면서 진출했다.
영국을 포함해 일본과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전시를 열어왔으며, 지난해 러시아에서까지 전시를 열기로 했으나 코로나19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앞서 언급한 광주 전시는 세번 미뤄진 끝에 성사된 것이다. 국내 전시마저 어렵게 열었을 만큼 코로나19는 예술가의 운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그가 무안 분청에 주목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무안에서 모든 필요한 재료를 다 구하죠. 분청의 발상지가 이쪽일 만큼 적토가 풍부해요. 적토는 무안을 비롯해 고흥, 전북 부안, 경남 김해 등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아울러 무안에는 가마가 많은데다 유약이나 흙, 전통 근간으로 하는 망생이 장작가마 역시 많아 작업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요."
시대가 흐르면서 가마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내화벽돌로 만들어진 가마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내화벽돌을 쓰게 되면 영구적으로 편하지만 반듯해 깊이있는 색감을 얻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이다. 망생이 장작가마는 천정이 울퉁불퉁 할 수밖에 없어 똑같은 유약을 쓰더라도 여러 색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게 자신만의 분청작업의 특징을 물었다.
"전통을 고수하면서 모든 재료를 무안에서 구하죠. 무안에서 만들어진 도자의 파편들이 많은데 근사치에 가깝게 작업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할 의무와 책임감이 있다고 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만 할 것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은 작품들도 시도를 많이 해야한다는 믿음입니다."
다만 무안 분청에 대해 국내 인식이 낮은 점은 보완해야 할 내용으로 꼽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무안 분청을 더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일본에서 접근이 쉬운 경남 김해 분청은 알아주지만 무안 분청만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이유로 접근하기 어려운 교통을 꼽았다.
무안 분청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이 그가 무안 분청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이유다. 분청으로 달항아리를 구현하기 어려운데 구현을 한 이면 역시 무안 분청을 세계에 알리고픈 그의 마음이 먼저 동해서다.
아울러 그는 요즘 도자의 패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촉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반드시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흙을 만져보게 하라는 주문이다. 자연 그대로 오감을 느껴야 하는 것처럼 흙에서 느끼라는 것으로 이해됐다.
그는 무안 분청을 알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중국식의 다구 및 관련 문화를 탈피해 변화시킬 각오를 밝히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코로나19 여파로 해외 5개국 전시가 무산됐었습니다. 도자기는 썩는 것이 아니니까 차분히 다음 기회를 기다려볼까 해요. 물론 생계를 위해 예술자기 7, 생활자기 3 비율로 해나갈 것입니다. 무안 분청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중국식으로 쓰이고 있는 다구를 전통적으로 하나 둘 바꿔 나가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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