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34호=정채경 기자)
차의 근본이자 정신인 ‘중정’(中正).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적당해야만 차의 향과 맛이 탁월해 차기(茶氣)가 온전히 전달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차와 물이 있어도 적당한 온도와 시간이 안맞으면 맛과 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제다(製茶)도 마찬가지다. 다인이 중정을 잃으면 좋은 차가 탄생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가 차를 우릴 때 항상 강조한 중정은 동양사상의 중용(中庸)과 궤를 같이한다.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이 올바르고 변함없는 상태 말이다.
어찌 보면 중정은 세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정신이자 덕목이 아닐까. 이같은 중정의 정신을 반세기 가까이 삶에 적용하는 이가 있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서예가이자 차 연구가 명은당 성화자 초의차문화연구원 원장의 이야기다.그는 1970년대부터 차를 즐겨온 ‘차인’이다. 불교 사상에 심취해 광주와 전남지역 스님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차를 배웠다고 한다. 사찰에서 차인들과 함께 차를 즐기던 그는 더 나아가 1980년 중반 일지암에서 주석한 여연스님과 만나고 선차와 한국 차 전반에 관한 연구에 발을 들였다.
성 원장은 현재 광주 동구 궁동 예술의거리에서 초의차문화연구원을 이끌며 차 문화를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이론과 실질 행다를 가르친다. 세계 각국을 돌며 우리 전통 차의 우수성도 알려왔다. 30년이 넘은 명송다회를 비롯해 설원다회, 선다회, 어린이다회 등을 꾸준히 가지며 우리 차 문화를 일궈온 장본인이다.
“어릴 적에 집이 화훼농가를 해서 일본에 묘목을 수출했어요. 그래서 차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고 가족들이 모두 차를 즐겼죠. 화엄사에서 직접 깎아 만든 나무 통에 차를 넣어 보내주시면 그걸 내려 마시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에 따르면 차의 근본은 마음에 있다.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수련과 명상은 필수다. 따라서 다양한 인문학적 바탕은 차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다. 차를 대하는 자세가 생활화되면 차는 차인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돼 있다. 차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차는 온 우주가 동원돼 내 입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 같은 마음을 지음이라 하죠. 학문은 나만 알려고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지음, 보은하는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 거예요. 차를 마신다는 것은 온 우주가 오는 것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깨닫는 일이죠.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으니까요.”
찻자리에서는 우주보다 내가 더 귀한 만큼,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자리는 절대 평등하다고 한다. 그게 바로 ‘중정’이다. 그는 차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 1980년 서예 애호가로 첫발을 내디뎌 현재까지 현역 서예가로 활동 중이다. 연우회와 지선묵연회 등을 통해 현역 서예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시작은 단순했어요. 애들 아버지가 말하길 제가 할머니가 돼서 곱게 한복을 입고 붓글씨를 쓰고 있으면 손주들의 본이 되지 않겠냐는 거였죠. 듣고 보니 좋아서 학정서예연구원에 들어가 당대 명필인 학정 이돈홍 선생님의 문하생이 됐죠.”
단체전에 참여하는 등 작품 활동은 활발히 했지만 개인전은 가져본 적 없었던 그는 최근 팔순을 기념해 도예가인 김경아씨와 모녀전을 선보였다. ‘팔질안여요도홍’(八耋顔如夭桃紅·여든 노인 양 뺨이 도화처럼 붉어지네)이라는 타이틀로 이뤄진 그의 첫 전시(4. 4~10, 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는 초의선사의 시 ‘동다송’의 시구를 인용했다. 전시는 성 원장과 둘째 딸인 도예가 김경아씨의 2인전으로 구성됐다. 10폭 병풍과 족자 형태로 된 그의 서예 작품뿐만 아니라 딸이 만든 도자에 어머니가 글씨를 쓴 작품 등이 관람객들을 맞았다. 전시기획은 막내 아들이자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인 김병헌 박사가 맡았고, 자영업을 하는 큰 아들 김두성씨는 전시를 뒷받침해 문화예술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10폭 병풍

성 원장이 차 연구가이자 서예가로 활동한 시간이 워낙 길고, 자녀들 역시 현직 미술인이어서 전시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들을 잘 모르더라도 모녀가 팔짱을 낀 채 목욕 바구니를 들고 가는 뒷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보고 홀린 듯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도자기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묵향과 차향에 흠뻑 취해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전시 오프닝에서는 그날 관람객들에 한해 경아씨가 직접 빚고 성 원장이 글씨를 새긴 찻잔이 증정됐고, 차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시간도 마련돼 여느 전시와는 차원이 다른, 품위있는 시간을 선사했다.
“학정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한동안 붓을 안잡았어요. 서예가로 활동했지만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개인전을 연 적도 없었죠. 팔순 잔치 대신 전시를 갖자 했던 게 코로나19 여파로 좀 늦었네요. 제 전시를 본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거장 서예가들이 75세를 못 넘겼는데, 80세 넘어 전시를 여는 것은 대단한 거라고요. 부끄럽지만 자긍심을 느끼죠. 개인전 하는 사람들이 다 위대해 보이기도 하구요. 준비해준 자식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는 차와 서예는 닮아 있다고 말한다. 일상 그 자체, 공부에 끝이 없는 점이 그렇다. 특별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같은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는 몇 십여 년간 함께한 차인, 문인들과 신뢰로 묶여 있다.
“밝은 얼굴로 차를 내어 주고 글을 써준 일들, 예법을 가르쳐준 것, 미리 장을 봐뒀다가 모임이 끝나면 항상 밥을 지어준 일 등.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너무 기쁘더라고요. 사람들을 생각하며 했던 일들이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차의 저변 확대를 위해 오는 4일부터 7일까지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릴 ‘2024 국제차 공예&티푸드 박람회’에 참가한다. 성 원장이 내려주는 차는 호남차인회 티파티 코너에서 6일 오후 1~4시 맛볼 수 있을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처럼 차 연구가로, 서예가로 어떤 것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들려줬다.
“정신의 질서를 바로 잡는 차는 종합예술이에요. 서예도 그렇죠.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차와 서예를 즐기면서, 건강한 정신문화를 가꿀 겁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