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나 여백은 필요하다. 이 단정에서 예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여백은 공(空)의 미학이자 비움의 표상, 그리고 쉼으로 해석된다. 현대인에게 삶의 표상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도 이런 의미의 여백이 화면 안팎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여러 여건들이 겹치면서 유년시절부터 꿈꿔온 그림 그리기는 한동안 침묵에 들어갔다. 쉼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일상 속 여백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가 일상 속에서 경험한 여백은 지속하지 못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그림 그리기로부터 잠시 벗어나 있던 때였을 듯 싶다. 유년시절 꿈꿔왔던 미술은 결혼 전까지 적어도 그에게 여백 그 상태였다. 물론 대학 재학시절 한동안 열병을 앓았을 것은 미루어 짐작된다.
이에 반해 그의 화면 속 여백은 일상의 여백과는 다른 결을 유지한다. 그냥 텅빈 상태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의 화면 속 여백은 공이니, 비움이니, 쉼이니 하는 것을 지나 끊임없이 편안한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지금도 화면 속 여백은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미술은 그를 온전하게 지탱하는 한 축이었던 셈이다. 여전히 그에게 여백을 향한 붓질은 끝나지 않고 있다.
한국화가 이영숙씨(58)의 이야기다. 작가는 여백을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는 경지로 인식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편안한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만큼 완성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가는 과정에서의 개념이다. 오죽하면 작가는 앞으로 ‘여백을 잘 살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겠는가. 그만큼 그에게 여백은 자신의 화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그 자체다.
"작품 안에서 여백은 그림의 멋과 맛을 좌우하죠. 여백의 비중이 높지만 여백이 제 화면에 여전히 채워지고 있다고 보면 돼요. 지금도 여백을 잘 살리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색채를 살리다보면 여백이 커지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적어도 그는 여백의 중요성을 이처럼 인식한다. 그가 말하는 여백은 화면에서 밀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 채워넣어야 하는 것으로 반추된다.
그만큼 그는 여백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실 그가 여백을 논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일상 생활을 극복하며 창작을 꾸려가는 것이겠지만 그에게 일상은 작업의 단절을 불러올 만큼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마음에 자리를 잡은 작업에의 열망은 꺾지 못했다.
결혼 후인 1995년 광주MBC 주최 전국여성 서화백일장에서 대상을 당당히 거머쥐면서 전환점을 마련한 그는 그후 10여년의 연마기를 더 거친 뒤 2005년 드디어 첫 개인전을 열면서 화단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그는 2005년 9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남도예술회관에서 ‘여백으로의 초대’라는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연진회 습작기를 거쳐 우송헌 김영삼 문하에서 10년 넘게 기본기를 다져왔기 때문에 그의 필체는 탄탄했다. 더 나아가 남성적 힘이 넘치는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평이다.
첫 개인전은 그 자신에게 여러 의미를 띄고 있다. 첫 개인전 이후 전라남도미술대전과 광주시미술대전 등 모두 초대작가를 지내게 된다. 화단에서 영역이 넓어진 것이다. 그는 이때를 자신이 프로작가로 데뷔한 시점으로 본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그의 데뷔는 40대로 볼 수 있다. 남들보다 한참 늦었다.
그에게 30대 때는 그림 연마를 하는 시기였고, 40대 때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시기였다. 50대인 현재 변화기로 규정한다.
사실 그 역시 현재의 화면을 선보이기까지는 변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감내해야 했다. 일상은 작업에 관대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숨통을 조이듯 옥죄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런 흐름을 타기 위해 노력했다. 욕심을 낸다고 해서 그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꾸준히 작업을 전개해 나간다.
그에게 두 가지 일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족을 챙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붓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어려움은 여전히 주부로서의 삶이다. 주부로서의 삶 그 자체가 힘들기보다는 그것과 병행하며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붓을 잡으면 그 감각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집일 때문에 맥이 끊겨버린다는 점이 어렵습니다. 붓을 잡으면 작업에 몰입해 방점을 찍어야 하니까요. 설령 일상 속에 함몰되더라도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때문에 식이요법 등의 노력을 펼쳐나갑니다. 저 나름대로 작품에 집중해 저만의 정신을 화면에 투영하고자 하죠."
그에게 붓은 삶 그 자체다. 이제 붓을 놓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저는 작품활동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습니다. 붓을 잡지 않고 사는 것은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붓을 안 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기도 했죠. 가만히 제가 저를 보면 붓에 참 많이 의지하고 있더군요. 물론 모든 생활과 병행해 끌고 가야 하니까 어렵기는 해요. 이제 작업은 제 운명과 같은 길이 됐죠. 화가로서의 삶이 어렵지만 제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해 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붓이 위로가 되고, 용기를 복돋워주네요."
그는 요즘 아크릴을 활용한 색채에 집중한다. 이 색채는 단순하게 화면 속 색채만은 아니다. 그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맑은 기운의 표현’ 혹은 ‘정신이 느껴지는 그림’, ‘감성의 분출’ 등으로 평가를 받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근래들어 색채를 강하게 구사하는 이유를 들려줬다.
"제가 많이 안 좋을 때가 있었습니다. 단색 위주의 먹으로만 작업을 하다보니 우울증 같은 것에 빠져들었죠. 색채를 환하게 쓰니까 제 마음도 밝아지더군요."
그는 몇년이 더 흘러가야 자신에게 맞는 색채를 화면으로 불러들이게 될 지 모른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색채를 위한 여정을 지속해나갈 작정이다. 그리고 여백을 맞을 채비를 한다. 그에게 색채와 여백은 적어도 분리된 것이 아닌, 합일된 경지 그 어느 지점으로 읽혔다.
"묵(墨)을 위주로 채색 작업을 벌여 나갈 겁니다. 지금은 색채를 강하게 해 먹과 어우러지며 현대 분위기와 조화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만요. 앞으로 색을 강하게 구사하며 변화를 지속해나갈 작정입니다. 아울러 정신적인 것을 많이 추구해 왔는데 제 그림의 지향점은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지점에서의 평온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보고 싶은 작품에 대해 들려줬다.
"죽기 전에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해보고 싶습니다. 미련없이 말이죠. 지금의 화풍을 이어가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시도해나갈 계획입니다."

한국화가 이영숙은
△전남 고흥 출생 △개인전 4회 △단체전 150여회 △코리아 아트 페스티벌 초대전 △월간 서예문인화대전 초대전 △전국 의재백일장 대상 △전라남도미술대전 입·특선 △광주시미술대전 입·특선 △전국목우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 입·특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 △전라남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광주시미술대전 심사위원 △목우미술대전 심사위원 △광주대 평생교육원 강사 역임 △먹그림회·목우회 회원 △한국미술협회원.

고선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