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變奏)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기존 악곡의 가락이나 장단을 새롭게 바꾸는 연주기법을 말한다. 화가의 삶과 회화정신을 조명하는 데 있어 굳이 이 음악적 용어를 빌려 설명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30대 젊은 신예작가들의 실험정신과 당찬 도전의식이 마치 변주처럼 생각이 되어서다.
앞서 미래 광주화단을 이끌 젊은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길은 기대반, 우려반이라고 심정을 내비친 적이 있다. 그러나 대개 그 연배 전후의 작가들 동향이나 활동이력을 들여다보면서지금 어떤 작업을 하고 있고, 화단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대충 그 작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에도 젊은 작가를 선정하고 취재하기 위해 우선 그 작가에 대한 보도내용과 포털의 각 블로그 등에 올려진 글들을 살펴보고 그 작가의 변주 폭을 살핀 뒤 바로 다음날 일정을 잡아 작업실을 방문했다. 그는 현재 남구 사동 사직공원내 광주청년예술인지원센터 2층 작업실인 공동창작실에 머물며 작업을 펼치고 있다. 전남 장흥 출생 한국화가 이선희씨(36)의 이야기다. 이 작가는 이곳 1기 작가로 6개월을 입주해 활동을 펼친 뒤 한번 더 공모절차를 밟아 재입주, 작업을 펼치는 중이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자정무렵까지 작품을 위한 여정을 지속한다.
그는 인물 위주로 작업을 펼쳐온 작가다. 화면에는 주로 여성이 등장한다. 이 여성은 꼭 정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원칙은 있다. 처음에는 내면 이야기에 치중했다. 여성의 목덜미나 여성의 뒷모습에 천착했다.
"주로 보이지 않는 여성을 그렸을 때 제가 표현하려는 감정에는 더 집중할 수가 있었어요. 소소한 기쁨과 인생의 아픔 등 치유의 과정일 수 있지만 처음에는 제 스토리였죠. 그래서 제 작품은 그림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제 아픔을 시뮬레이션(simulation·재현기법)한 후 작업을 합니다.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 작품에 스며있는 감정과 공유하더군요."
그가 인물 위주의 작업을 펼치지만 인물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꽃을 끌어들여 더 많은 메시지를 투영한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꽃은 촉매제다. 길가에 많이 널려 있는데다 누구나 꽃에 대한 기억 한 토막씩을 저장하고 있어 그만큼 각자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촉매제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의 작품은 급격하지 않은, 완만한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는 변화와 반복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
"작품이 늘 변화없이 같은 것만 반복하면 재미가 없죠, 어떤 구체적 이야기들을 한다기 보다는 현상적인 인물에서 탈피, 사람의 감각을 더 끄집어내 밀도높은 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일상 이야기들인데 인물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조금 질리더군요.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약해진 것 같고, 또 여성에 초점을 맞춰 몰두해 왔지만 그래도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싶었죠."
요즘 그의 작업은 실험에 접어든 듯 보였다. 여성을 일부를 벗어나 무당 등을 등장시키고 있는 가운데 작품의 폭을 넓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올해 작업 모토는 편하게 다양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다.
이런 그는 어떻게 미술에 입문했을까.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 미술을 하고 싶어 부모 몰래 미술학원에 다녔다 한다. 부모가 탐탁치 않게 여겨 드러내놓고 못했다. 그러다 국립대에 진학하면 허락해주겠다는 부모의 약속을 믿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로 방향을 틀어 전남대 미술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뒤 대학을 졸업했으나 현실은 호락 호락하지 않았다. 대학원도 일반대학원이 아닌, 교육대학원에 들어갔다. 이래 저래 졸업 후 미술을 쉴 수밖에 없었다. 대신 미술관 등에서 코디네이터와 에디터 등을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을 접하다보니 다시 창작을 하고 싶은 열망이 꿈틀댔다. 스물여덟 되는 해 의재미술관 레지던시에 뽑혀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창작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나서 그 이듬해인 스물아홉때 화순 소아르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열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화단에 늦깎이로 데뷔한 그가 실제 창작활동을 한 것은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이 10년 동안 그는 레지던시 입주를 하고, 첫 전시를 열었으며, 문진기금을 수혜받는 등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여성을 느끼게 해주는 회화’를 구사하고 있는 그의 작품 속에는 한때 자신을 소재로 등장시켰다. 그림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여성의 목덜미 등 신체 일부를 부각해 꽃과 같은 것을 더해 그림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그가 구사하는 색채는 따뜻하고 차분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안겨준다.
그렇다고 세상살이에의 고뇌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모의 투병으로 낮에는 간병하고, 밤에는 작업실로 돌아와 창작을 해야 하는 이중고도 겪었다. 그의 작품을 유심히 봐온 사람들이라면 젊은 날의 슬픔과 공허, 애잔함이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페미니즘적 여성상이 아닌 그만의 감각적인 여성성이 노정된다.
2014년은 그에게 복합적인 의미를 띄는 해로 기억돼 있다. 부친의 간암 진단과 수술 후 간암 오진, 모친의 페암, 그리고 엄청난 충격에 빠뜨린 세월호 사건 등 삶의 안팎에서 아픔이 한꺼번에 그를 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아픔을 형상화한 ‘닿을 수 없는’은 대표적으로 세상살이에 대해 눈을 감을 수 없는 작가의 감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당시 병원에서 나와 화순 벚꽃길을 걷는데 벚꽃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세월호 영혼들이 훌훌 날리고 있는 듯해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도 벚꽃이 아픔이었다는 것을 공유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분채를 쓰는 작가가 많지 않음에도 분채를 쓴다. 변하지 않고 오래 가는데서 호감을 갖는다. 그리고 분채가 주는 묘한 색감이 있어 분채를 즐겨 구사한다고 한다.

그는 창작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겪는 먹고 사는 문제를 벽화에서 찾았다.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냈다. 벌써 벽화를 해온지는 10년이 됐다. 수입원 대다수는 이 벽화에서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7월 하순에는 장성에서, 지난 8월10일에는 화순에서 벽화작업을 진행했다. 이처럼 벽화를 선택한데는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어서다.
현재 작업은 지난 6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대인동 김냇과 지하 전시장에서 오는 10월 예정된 제5회 개인전 ‘꿈속의 향기’(몽중향)전을 앞두고 한층 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서정적 꿈에 대한 형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김냇과 지하 전시장이 규모가 크지 않아 아주 많은 작품을 선보일 수는 없어요. 살풀이를 형상화한 큰 작품 3∼4점을 포함해 모두 16∼17점 정도를 내걸 예정입니다. 큰 작품이라고 해도 100호를 넘길 수 없어요.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예요. 조금 좁다보니 1층 카페 공간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동안 공모전만 했는데 처음으로 상업갤러리에서 하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그는 매년 전시를 열다가 힘들어 지난해는 쉬었다. 지난해 여유가 있었는데 그 에너지들을 모두 올해 전시에 쏟을 생각인 가운데 내년에는 여건이 허락되면 서울에서도 전시를 추진해볼 계획이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요. 사실 사는 게 넉넉하지는 않지만 작업 환경이 개선되기를 희망하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인정을 받으면 좋지만 그보다도 저는 그림이 갖는 치유과정에 만족합니다."

고선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