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호·제70호=박세라 기자·최기남 기자) 하얀 종이 위, 사진 하나가 떡하니 박혀 있다. 시퍼런 바다 위 둥실 떠 있는 ‘삼선슬리퍼’ 한 짝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대로, 바람이 이끄는 대로 슬리퍼는 정처 없다. 사진 위로는 ‘No Doubt’(노다웃:확신)이란 표제가 그 의미만큼이나 확실하게 쓰여 있고, 그 주변으로는 ‘백수’라는 부제가 여러 개 텍스트로 배치돼 있다.
"삼선슬리퍼는 백수건달들의 상징이죠. 망망대해에 떠 있는 슬리퍼를 보는데, 저것이야말로 백수들의 현실이다 싶은 겁니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 또 어떻게 가야할지 몰라 헤매며 마구 흔들리는 게 백수들의 삶이죠."
광주의 백수들이 ‘백수’의 의미를 뒤집어엎는 잡지를 발간했다.
청년단체 ‘IAM’이 내놓은 청년인문잡지 ‘No Doubt’이 그것이다.
이들은 삼선슬리퍼를 창간호 표지에 내걸었는데, 이 역시 백수에 대한 부정적 편견에 맞서는 그들만의 방법으로 읽힌다. 표지 바로 뒤 페이지에 이들은 분명히 밝혀두었다. ‘백수는 노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흔들리고 누려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고.
지난 2월8일 광산구 야호센터에서 ‘IAM’을 만났다. 청년인문잡지 ‘No Doubt’은 IAM 멤버인 남인우, 김태희, 이하영 세 명의 청년들이 만든 결과물이다. 기획부터 취재 및 편집·디자인까지 전 과정을 모두 청년들이 도맡았다.
창간호 백수편에는 당당하게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청년인터뷰, 마음을 토닥이는 에세이·시 등의 글들이 실렸다.
생각의 조각들이 그럴싸한 간행물로 만들어지기까지 3개월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정확하게 세 청년들이 만나 공부하고, 떠들고, 논쟁해 온 세월은 그보다 몇 배나 더 길다.
"IAM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단체 ‘예기치못한기쁨’에서 함께 공부해 온 친구들로 꾸려졌어요. 정기적으로 만나서 생각을 나눠왔는데, 주제의 심도와는 다르게 우리의 이야기가 금방 증발해버린다는 느낌을 받았죠. 청년들이 내다본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자, 그리고 기록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녹여낼 수 있는 장이 바로 잡지더라고요."
처음부터 창간호 주제를 ‘백수’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노다웃’이란 잡지에 대해 오래 논하다보니, 그 발음이 비슷한 ‘노답’이 먼저 떠올랐다. 노답이란 영어 ‘NO’와 국어 ‘답’을 합친 말로, 해결방법이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요즘의 청년들이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을 자조적으로 표현할 때 쓴다. 쉽게 말해 ‘답이 없다’ 정도의 뜻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다. 학생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또 졸업 후엔 취업을 해야 하는 것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미션’처럼 주어진 일들이 답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누군가 정해놓은 길이 과연 정답일까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정말 패배자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했죠. ‘노답’ 즉 답이 없다는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무엇이든지 답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무한하고도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자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백수’들이었어요."

IAM 멤버들이 ‘노다웃’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하영, 김태희, 남인우

그 길로 백수들을 물색했다. 패배자가 아니라, 폼 나게 살고 있는 백수의 삶을 그대로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한 사람은 백수를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했고 또 한사람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전에서 백수는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로 정의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 시선으로 바라본 백수의 삶이죠. 그러나 진짜 일정한 직업 없이, 혹은 있던 직업도 버리고 백수의 삶을 택한 그들의 삶은 훨씬 건강해 보였어요. 사회의 틀·인식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을 위한 삶으로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아마 이들이 영원한 백수로 살아가진 않을 것이라 생각해요. 백수의 삶을 온전히 누리고선, 진짜 자신이 찾은 ‘답’을 찾아가겠죠. 그 과정에서 얻어낸 자신만의 정답은, 앞으로 그들 삶을 짱짱하게 해 줄 원동력이 돼 줄 거라 믿어요. 반 백수인 ‘IAM’ 저희들 또한 마찬가지겠죠."
총 1000부가 나온 ‘No Doubt’은 전국의 청년 문화 단체, 지역에 있는 독립출판물 서점, 문화 기관 등에 고루 배포됐다. 잡지 안에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담겼다. 그 중 ‘청년의 일상을 대필해 드립니다’가 눈에 띈다. 누구나 하고픈 말들을 써내 보내면 음악으로 만들어 QR코드에 실어준다.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오랜 고민들을 털어버리자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읽힌다.
여기다 ‘꿀 빠는 백수생활’이란 섹션에는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들을 공유했다. 백수가 쓰기엔 다소 모순적이나 ‘2019 생활계획표’도 포함됐다.
백수의 또 다른 뜻 ‘온갖 짐승’(백수 百獸)들을 장식한 페이지도 재미있다. 이들은 사자를 타고난 금수저 백수라고 했고, 나무늘보는 잠만 자는 백수, 미어캣은 부모님 눈치를 보는 백수로 표현했다. 귀여운 캐릭터들은 머지않아 캐릭터 디자인으로 탄생, 문화상품으로 만나볼 수 있을 계획이다.
이들이 담아낸 청년 백수들의 이야기는 청년 독자들은 물론, 6070 노년세대에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너희만 백수냐, 우리도 백수"라는 유쾌한 공감대가 형성된 덕이다.
청년 백수들의 솔직한 기록은, 은퇴 후 삶을 사는 어르신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란 진중한 질문을 남겼다. 자칫 무거울 수 있을 법한 주제를 재미있고도 날카롭게 다뤄 낸 덕이다.
"이 땅의 수많은 백수들을 대표하는 청년 백수들로서 백수의 긍정적인 힘들을 제대로 알려 나가고 싶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백수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백지와 같은 존재예요. 그 하얀 도화지 위에는 무엇이든지 그릴 수 있고, 무엇이든지 담아낼 수 있죠. 열심히 공부한 것들, 또 일련의 경험들을 기반으로 주변에 재미난 영향력과 영감을 주는 매개체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 잡지에 다루고 푼 주제에 대해 물었더니, 취직, 이직, 사직, 퇴직 등 다양한 단어가 술술 튀어나온다. 그만큼 사회에 내던지고픈 메시지가 많다는 뜻일 게다.
"아이들은 놀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죠. 허나 어릴 때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한평생을 놀면서 배우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았을 때 백수는 무언가를 끝없이 배워가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혹시 현실에 좌절하고 있는 청춘이 있다면, 혹은 진짜 자기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못 찾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우리 잡지를 전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답답하고 막막한 삶에 ‘No Doubt’(확신)을 줄 수 있는 장치가 됐으면 합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