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 거주가 역사적 증명 VS 실질적 고증 없어

[이달의 이슈]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 복원 어디까지
임진왜란 때 왜구 격퇴…반란 연루 무고로 역적 몰려 옥사
충장로 등 충의정신 곳곳 스며…노후화로 생가 철거 결정
문중-지자체 수년간 이견…전남대에 용역 의뢰 결과 주목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0년 10월 08일(목) 15:45
(2020년 10월호 제89호=송대웅 기자)광주 동구의 ‘충장로’는 지역을 넘어 호남 상권의 중심지이자 근·현대 역사의 상징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3·1운동과 1929년 학생독립운동 때 최초로 일본학생들과 충돌한 곳이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금남로와 더불어 치열한 항쟁의 거리였다.
즉, 광주를 ‘의향(義鄕)의 도시’로 부르게 된 상징적인 장소이지만 그 누구도 ‘충장로’라는 도로명이 어디에서 착안했고, 어떻게 부여됐는지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충장로’라는 도로명은 조선 선조때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왜구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 출신 의병장 김덕령(1567~1596) 장군의 시호인 ‘충장공’에서 비롯됐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충장공의 ‘구국정신’이 충장로에 투영되며 지금까지 ‘의’(義)를 상징하는 거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지역에서 ‘의’를 상징하는 핵심적인 인물이지만, 이름이 알려진 여느 위인들과 달리 그가 나고 자란 생가는 현재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후손들이 모여 수년 째 충장공의 생가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 중이지만, 이를 입증해줄 만한 역사적 고증이 없어 쉽지 않은 상태이다.
이에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생애를 되짚어보고, 그가 나고 자란 생가 복원의 과정 및 부침 등을 조명해본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장사와 김덕령 장군의 초상화

광주 ‘의향의 상징’ 충장공 김덕령 장군
조선 선조 25년(1592년)에 들어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명분을 내세워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금세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뒤 곧장 한양을 향해 내달렸다.
전쟁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조선은 고작 20여 일 만에 한양을 내줬고, 급기야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전국 각지에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민초들이 들고 일어섰다. 바로 ‘의병’이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경상도의 곽재우와 정인홍을 비롯해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왜구를 격퇴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등이 왜구 격퇴의 최선봉에 섰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5년 전인 1568년 12월 전라도 광주목 석저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석저촌은 현재 광주 북구 충효동 충효마을이며, 성안마을로도 불렸다.
김덕령 장군이 25세가 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인 김덕홍과 함께 고경명 장군의 막후로 들어가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을 선택, 모친의 사후까지 지킨 뒤 다시 1593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받았고, 전란 당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 등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1594년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나섰고, 1595년 고성에서는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해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다. 김덕령 장군은 이들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결과적으로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하는 공을 세우게 됐다.
하지만 1596년 7월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게 됐고, 곽재우 등과 함께 체포됐다. 평소 김덕령 장군의 충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무고를 힘써 항변했지만 20일 동안 6차례에 걸친 선조의 지독한 친국으로 인해 결국 30세의 나이에 옥사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내비치는 ‘춘산곡’을 짓기도 했다.
이후 1661년 현종의 명으로 신원돼 관직이 복구됐고, 병조참의에 추증됐다가 숙종 때 병조판서에 다시 추증됐다. 또 정종은 김덕령 장군의 ‘충의’를 높게 사 그가 태어난 곳을 충효리로 개명하고,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 1975년 2월 무등산 자락인 북구 금곡동에 그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충장사’도 조성됐다.

광주 곳곳에 녹아있는 ‘충장’(忠壯)의 정신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부분의 도시에서 자기 고장을 빛낸 인물의 이름이나 아호, 시호나 군호를 따서 도로 이름을 붙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광주 역시 예외는 아니며, 그 대표격이 동구의 ‘충장로’이다.
‘충장로’는 광주 읍성시대의 북문과 남문을 잇는 지역의 대표 남북대로이다. 옛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곳 중 한 곳이다. 이 때문에 충장로는 ‘광주의 명동’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시절, 충장로는 ‘본정’으로 불렸고, 해방 이후 1947년에 지금의 도로명인 ‘충장로’로 명명됐다. 충장로는 충장로 1가 입구에서 광주일고를 경유해 경열로 연결지점까지 1600m 구간이다.
이때 ‘금남로’라는 명칭도 같이 부여됐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맞서 물러섬 없이 싸운 인물의 시호와 군호에서 착안했다.
광주 동구청에서 지난 2003년부터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에서 상권을 활성화하고, 장군의 의로운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 10월께 ‘충장축제’를 열고 있으며, 1970~1980년대의 추억과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행사와 함께 김덕령·고경명 장군 등의 의병출정식 행사를 개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충장’이라는 시호의 쓰임은 비단 도로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70년 3월 개교한 충장중학교를 비롯해 1989년 31사단의 부대명칭을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기상과 충정을 본받기 위해 ‘충장부대’로 명명했다.
이처럼 다양한 쓰임새 만큼 충장공의 정신은 광주 곳곳에, 그리고 시민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

흔적조차 없는 생가…생활 쓰레기만 가득
광주 북구 충효동(충효샘길 40)에 위치한 충장공의 생가는 광주호호수생태원 주차장에서 직선거리로 80여m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생가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 중순께 충장공의 문중이 노후화를 이유로 철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충장공의 생가 터에는 이곳에 생가가 존재했었다
는 사실을 알려주는 알림판과 장군의 생애를 간략하게 새긴 비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 생가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는 ‘김덕령 장군 생가터 복원사업 예정지’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설치돼 있으며, 그 뒤로 소파, 침대 메트리스 등 생활쓰레기가 각종 초목과 함께 뒤엉켜 나뒹굴고 있다.
지금은 철거돼 버린 충장공의 생가는 지난 1970년께 문중 사람들이 제사를 목적으로 십시일반 돈을 걷어 만들었다. 목조 5칸 기와집 형태(82.6㎡)의 생가를 조성해 종손이 거주하며 제사 등을 도맡았다.
이후 40여 년이 흐르면서 충장공의 생가는 노후화로 흉물스럽게 변했고, 이를 목격한 관광객들이 행정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하자 결국 문중 관계자들은 ‘생가 철거’를 결정했다.
이어 문중은 내부 논의를 거친 끝에 지난 2016년 광주시, 북구청 등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등을 받아 충장공의 생가를 복원하기로 했다.

"후손이 거주" VS "역사적 고증 없어"
하지만 문중의 의중과 달리 충장공의 생가 복원 계획은 수 년 째 난항을 겪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생가터에 대한 ‘역사적 고증’ 존재 유무가 있다.
관할 지자체인 북구는 "생가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고증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실제 지역 일부 사학자들 역시 지금의 충효마을이 충장공이 태어난 곳임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고증은 있지만 문중에서 주장하는 생가터의 경우 입증해줄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문중에서는 "충장공이 무고로 ‘역적’이 되면서 관련 자료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충장공과 그의 형·아우 등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 때 충효리(지금의 충효동)에 세운 정려비각과 충장공이 태어날 때 심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왕버들 군(천연기념물 제539호), 현재까지 생가터 인근에 살고 있는 후손 등을 고려했을 때 지금의 장소가 생가터가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실제 김덕령 장군은 1596년 역적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만 29세의 나이로 옥사하면서 후손이 없었다. 이후 정조는 그의 동생인 풍암공 김덕보의 후손인 김수신에게 벼슬을 내리고 봉사손(일종의 양자)으로 삼았는데 그 김수신의 후손이 현재 생가터 인근에서 거주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중의 주장이기 때문에 역사적 고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게 북구의 입장이다.
이에 문중에서는 실질적인 고증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 3월 수 천만원을 들여 전남대학교 산업협력단에 충장공 생가터와 관련된 용역을 맡겨놓은 상태이다.
이 용역의 결과에 따라 향후 충장공의 생가터 복원 계획 추진 여부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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