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에서도 ‘깡촌’으로 통하는 지산면. 이곳에서 제1세대 클래식기타리스트가 나왔다. 기타가 너무 좋아서 혈혈단신 스페인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세계 최고 기타리스트들에게 ‘진짜 연주’를 배웠다. 기타를 잡은 것은 이번 생의 ‘운명’이라 말하길 주저앉는 클래식기타리스트 서만재(61)씨가 그 주인공이다.

서 씨가 기타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지산면 마을에 단 한 대 뿐이던 통기타는 옆집 살던 동네 형의 것이었다. 형들은 통기타로 ‘목포의 눈물’ ‘베사메무초’ ‘타향살이’ 등 장르불문 구수한 곡들로 그의 귀를 자극했다. 기타 선율에 푹 빠진 그는 기타 주인 형의 뒤꽁무니를 따르며 기타를 배웠다. 기타 한번 튕기기 위해서는 형 대신 소밥을 챙겨 먹이고, 자잘한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쩌다 기타가 그의 손에 쥐어지면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단다.
“졸졸 따라다니다 한 번씩 기타를 잡게 해줬어요. 그러면 입이 함박 만해져선 기타를 튕겼죠. 소 위에 올라타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연주를 했어요. 그때는 악보 보는 방법도 모르니, 어깨 너머로 익힌 손기술로 기타를 쳤죠. 그러면 부모님이 ‘저 놈이 뭣 될 라고 그런다냐’며 호통을 치셨어요.”
그가 기타를 못 가진 것은 여느 예술가의 어린 시절처럼 ‘가난’ 탓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 읍에 한 번도 못 나가봤던 서씨는 “기타를 어디서 파는지 몰라서”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생애 첫 제 몫의 기타를 가진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친구의 작은아버지가 장롱을 제작하는 기술자였던 게 계기다. 친구는 작은 아버지가 만들어 준 기타를 가지고 있었다. 서씨는 또 친구 곁에 머물며 기타를 치고, 결국엔 친구를 꼬드겨 그때 돈 500원에 기타를 손에 쥔다. “얼마나 좋든지 밥 먹을 때도 손에 쥐고, 잠잘 땐 안고 잤다”는 그의 말이 당시 심정을 대변한다.
그렇게 ‘좋은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막둥이 아들이 ‘딴따라’가 될까 염려했던 그의 아버지가 그가 없는 사이 아궁이에 기타를 홀랑 태워버린 것. 아궁이 속, 모두 타 재가 된 기타를 바라보며 그는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다. 괜한 화풀이를 소‧돼지에게 했다가 집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서씨가 그렇게도 기타에 미쳐 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집안 내력과 무관치 않다. ‘소리’ 자랑하지 말라던 그의 탯자리도 그렇고, 그의 큰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해 바이올린을 했고, 고모는 가야금 연주자였다.
음악적 끼를 물려받은 그는 학창시절에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다. 교내 학예회 무대에서, 또 소풍날 기타 연주로 친구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그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악보를 보고, 정식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에다가 자기만의 음악적 색을 입힌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던 그가 통기타가 아닌 ‘클래식 기타’에 꽂힌 것은 스무 살 청년 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종로음악학원에 다니던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쳐진 독일 최고 기타리스트 베렌트의 연주회를 본다. 그 뒤 말 그대로 클래식 기타에 꽂혔다.
“고고하면서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선율을 듣는데 전율이 일었어요. 통기타가 대중적이고 친근한 느낌이었다면 클래식 기타는 고전적인,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귀한 유물을 발견한 것만 같은 신비한 매력이었죠. 이후엔 정말 클래식 기타에 미쳤어요.”
늘 기타를 쥐고 살았더니, 연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준 일도 있었다. 바로 군 시절이다. 군 위생병이던 그는 광주통합병원으로 내려 온지 한 달 만에 5‧18민주화운동을 겪는다. 민간병동의 반장을 맡은 서씨는 피가 철철 나는 광주시민들의 치료를 도왔다. 항쟁 기간 그의 군복은 피로 얼룩졌고 시민들도, 서 씨 본인도 힘든 나날을 보냈다.
공포에 질려있던 때, 그는 기타를 꺼내들었다. 군홧발에 짓밟힌 시민들의 몸, 그리고 상처 입은 광주 정신을 위로하고 싶어서다. 그는 시민들 앞에서 ‘로망스’ ‘라리아네의 축제’ ‘라그리마’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등을 선사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서 씨가 기타연주자로 TV나 신문에 종종 나오자 이를 알아본 시민들은 “그때 그 사람”이라며 그를 수소문했다. 당시 연주를 기억하던 시민들의 추천으로 2009년엔 제3회 오월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1984년은 그에게 특별한 해다. 피어선 신학대학교(현 평택대)에 한국 최초로 음악대학 기타 전공이 생긴 것. 최고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청년에겐 전공분야로 기타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곧 대학에 진학해 졸업할 때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기타를 잡고 살았다. 학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평택시민회관에서 독주회도 가졌다. 그날은 멀리 진도에서 봉고차를 빌려 타고 형님들도 올라와 그를 응원했다. 독주회는 그의 첫 연주회이자 고별무대이기도 했다. 그가 스페인으로 머나먼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음악원 기타과에 5학년으로 편입했죠. 스페인 기타 연주에 관심을 가진 저로서는 너무나 행복했어요. 여기 저기 여행하고 연주하고요. 그런데 딱 한 달이더라고요. 이후에는 고난의 길이 열렸어요. 언어도 안 되지, 친구‧가족은 없지 지옥 같았죠.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지금껏 한국에서 기타 좀 친다고 으쓱 했던 제 자신이었어요. 정말 처음부터 제대로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만 했죠.”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특히 당시 그의 신분은 ‘가장’ 이었다. 대학 시절에 만나 연애하다, 결혼한 아내와 아이들까지 있었다. 그가 스페인에 머문 시간은 10년이 넘는다.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에서 졸업을 하고 교수자격증까지 나왔지만 그는 또 그라나다 왕립음악원으로 편입, 공부를 계속했다. 아내는 옷 장사를 하며 그의 뒷바라지를 해줬다.
“가족에게 여전히 미안하고 또 고맙죠. 사실 아내가 내조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한국과 스페인 오가면서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타국 생활에서의 외로움과 힘든 삶은 또 기타 연주로 보답 받았죠.”
클래식 기타는 연주하기 까다로운 악기로 꼽힌다. 어떤 받쳐주는 악기 없이 홀로 멜로디와 화음을 동시에 소화해 내야 하기 때문. 그럼에도 서 기타리스트는 트로트부터 포크‧동요‧재즈‧플라멩코 등 다양한 레파토리를 자랑한다.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좋아하는 곡은 말라츠의 스페인 세레나데다. 스페인 곡들은 화려한 기교와 함께 열정적인 리드미컬함이 특징이다. 서 기타리스트는 “정렬과 애수, 열정의 멜로디가 눈과 귀 그리고 마음까지 즐겁게 해 준다”고 평한다.
한국교원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1년에 한 번씩은 꼭 ‘음악적 고향’인 스페인으로 떠나고, 틈틈이 작곡도 한다. 내년에는 한국인 최초, 기타로 예일대에 합격한 그의 제자 전장수와 함께 카네기홀 중극장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서 기타리스트가 키워낸 제자들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행복한 삶’이다 싶다.
“좋아하는 기타 마음껏 치면서 살았어요. 돌이켜보면 서만재와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진도 골짜기서 소몰이 하면서 튕기던 기타가 반백년 동안 제 인생과 함께 하게 될 줄 몰랐거든요. 그저 기타가 너무 좋았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던 것 같아요. 이만하면 운명, 소울메이트 아닌가요?”

△서만재 클래식 기타리스트는

-1955년 진도 출생
-피어선 신학대학교(현 평택대) 음악학과 클래식기타전공 졸업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음악원 졸업
-스페인 그라나다 왕립음악원 졸업
-스페인 그라나다 왕립음악원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광주가톨릭대학 평생교육원에서 후학양성

박세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