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무명인채로 약간은 가난한 채로, 또 외로운 채로, 사람들한테 사랑도 받으면서 그렇게 훌쩍 세월이 가버린 것 같아요. 40년 동안 외길을 걸어왔는데도 ‘가수왕’이 된 것도 아니고, 앨범이 대박 난 것도 아니니, 누군가는 나를 실패한 가수로 볼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한결같음’이 저에겐 가장 큰 동력이 돼 지금껏 노래하면서 살도록 해 준 것 같아요."
포크 명인 박문옥씨가 2017년이면 데뷔 40주년을 맞는다. 소회가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큰 부침 없이 아무 일 없는 것 마냥 세월을 지나왔다"면서 담담하다.
그의 말처럼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도, 모두 알 만한 히트곡을 낸 것도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그만하면 됐다 싶다. 지난 12월 17일 박씨는 오랜 노래인생을 보답 받는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 그를 존경하는 후배들이 박문옥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공연을 올린 것. 가수왕이니, 히트곡이니, 그 어떤 ‘타이틀’을 쥔 것 보다 더 빛이 나는 인생이다.
어린 시절 박문옥은 노래 잘하는 꼬마였다. 누나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꼭 노래 한 자락을 뽑았다. ‘헤어지면 못산다더니 나를 두고 어이 가셨나. 가슴 깊이 불을 지르던 그대 어이 떠나 가셨나.’ 태원의 노래 ‘사랑아 내 사랑아’를 즐겨 불렀던 그다. 그러면 다 큰 누나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열창이 끝나고 나면 이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남진, 나훈아, 그 시절 가수들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두 번 쯤 듣고 그대로 따라 부를 정도로 음악적 끼가 남달랐던 그다. 지금 그의 모습처럼 앞장서 가창력을 ‘뽐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노래 잘하는 친구로 소문은 파다했다.
"늘 노래하고 살았죠. 대학에 들어와 그림을 그리면서도 화실에서 기타를 치고 놀았어요.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때 저 포함 박태홍, 최준호 이렇게 세 명이 팀을 결성해 ‘전남대학교 캠퍼스 송 경연대회’를 나갔죠. 상당히 큰 축제였는데 거기서 1등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학교에서 친구들이 우리를 ‘빈센트’라 불렀어요. 미술학도들이 노래한다고 별칭을 그렇게 붙여 준거죠."
그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듬해인 1977년 제1회 MBC대학가요제가 열린다. 당시 노래잘하는 인재들을 찾던 광주MBC 측에서 ‘빈센트’를 찾아와 지역 대표로 나가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학가요제 예선도 보지 않고 출전 티켓을 쥐었다. 특별한 팀 이름이 없어 ‘전남대 트리오’란 다소 촌스러운 팀명으로 무대에 오른 이들은 ‘저녁 무렵’이란 곡으로 동상을 수상,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갖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남대 트리오’는 데뷔와 동시에 고별 무대를 갖죠. 그때 제가 4학년, 다른 멤버들이 3학년, 2학년이랬어요. 제가 졸업을 하고, 군대도 가고 하면서 잠시 활동을 중단 한 거죠. 사범대생들이었기 때문에 졸업하고는 교직에서 교사생활을 했고요."
교단에 섰던 ‘전남대 트리오’가 다시 뭉친 것은 박씨가 3년차 교사이던 때다. 노래하고 싶어 ‘좀’이 쑤시던 그들은 함께 모여 "우리 다시 무언 갈 해보자"고 결심했다. 사나이들이 칼을 뽑았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할 터. 그들이 그 길로 한 일은 동시에 사표를 던진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뭉친 이들은 ‘소리모아’란 팀명으로 활동, 1984년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을 발매한다. 박문옥, 김종률, 김원중 등의 노래가 담긴 앨범집이다. ‘예향의 젊은 선율’이 더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로컬리즘’을 표방했다는 점이다.
"앨범 이름에서부터 감지되듯 이 음반은 지역성을 띄고 있어요. 중앙 무대를 꿈꾸는 가수들은 자기들이 나서서 ‘지역 색’을 가지고 가진 않거든요. 스스로가 ‘지역성’을 내보인 음반으로는 유일할거에요. ‘예향의 젊은 선율’은 광주에서 노래께나 하는 친구들의 음원들을 모아서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예향의 젊은 선율’에는 ‘전남대트리오’의 뒤를 이어 대학가요제에 나갔던 김정식, 김종률, 김원중 등의 노래가 실렸다. 광주 포크 뮤지션들의 첫 발이 돼 준 의미 있는 앨범이다. ‘예향의 젊은 선율’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의외다.
"이동락 선생이란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요. 컴퓨터 관련 책을 썼는데 그 인세로 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의를 했어요. 광주 출신 포크 싱어들을 모아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요. 그 앨범은 지금의 저도 만들어줬고, 김원중 같은 인물도 키워낸 것이죠."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광주 포크’라는 박문옥만의 음악 세계를 열어준다. 그는 소리모아 결성 후, 트리오로 또는 솔로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직녀에게’를 비롯해 ‘전진하는 5월’, ‘양철매미’, ‘사랑은 강물처럼’ ‘가을가을가을’, ‘무등아리랑’ 등 1000개가 넘는 곡도 만들어 선보였다.
넓게 보면 포크란, 통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포크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80년 5월을 지난 후, 광주가 처한 역사적인 특수성을 담고, 노래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이 ‘광주 포크’의 특색이라 꼽는다.
"사실 저의 노래를 ‘포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80년 5월’로 대변되는 광주정신을 노래한 것은 맞죠. 사람들은 이를 ‘민중가요’ ‘저항가요’라고 분류했어요. 저는 다만 최소한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너무나 천박한 가사는 안 써야겠다고 한거에요. 엄청난 사랑 타령을 해서 돈을 벌겠다, 히트곡을 내겠다, 이렇게 마음먹은 것이 아니니 차라리 아름다운 가사를 써보자고 한 게 ‘광주 포크’로 자리 잡게 된 거죠."
자신의 노래를 ‘광주 포크’로 분류하는 것이 마뜩찮은 그이지만 두가지면에서는 당위성이 있다고 본다. 먼저는 광주의 아름다운 풍류를 담아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역사의식을 내 비춘다는 점에서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포크를 한다는 것은 외롭고 가난한 길을 가는 것"이라며 웃는다.
하지만 그에게서 포크가 갖는 ‘저항정신’의 가치를 떼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역 최초로 녹음실을 마련한 일만 봐도 그렇다. 당시 이른바 운동권의 사람들은 ‘테이프’를 팔아서 자금을 운용했다. 그 사람들이 박씨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카세트에 담요를 덮어놓고 녹음을 해줬던 그다.
그런데 ‘프로’로서 콘텐츠 질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 조금 더 잘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그는 고급 장비는 아니지만 적어도 반주와 목소리를 따로 녹음할 수 있는 멀티 녹음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86년도에 탄생한 것이 ‘소리모아’의 녹음실이다. 수많은 노래들이 이곳에서 제작, 광주 음악의 메카 역할을 해줬다.
"운동권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음악들도 열심히 도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운동권의 중심인물처럼 돼 있더라고요. 저는 그저 늘 그 자리에서 내가 가치 있다고 여겼던 일을 해온 것 뿐 인데요. 어쩌면 이런 묵묵함이 저만의 존재감인지도 모르겠어요. 시간이 주는 진실성을 기다리는 일, 일종의 전략인 셈이죠."
40년 노래했으니 그는 이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고 싶다. 주류에 편승하지 못한 친구들도 행복하게 음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등불’이 돼주고 싶은 것. 특히 그는 40주년 헌정 콘서트를 마련해준 후배들에게 ‘이렇게도 음악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다.
"곱게 늙어가는 모습, 흉하지 않게 세월을 견디는 선배의 모습이고 싶어요. 소위 뮤지션으로서 ‘대박’이 나지 않더라도 음악을 하면서 저렇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은 거죠. 이번에 40주년을 기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요. 개인적으로 10주년이네, 20주년이네 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 뮤지션으로서 길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죠."
최근 시끄러운 세상을 보며, 그는 ‘음악적 힘’이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 네 편 내 편, 우리와 저들 편을 가르는 게 아닌, 순수한 예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늘 ‘통일’을 노래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엿보인다.
"광주 시민들의 ‘미감’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노래를 하고 싶어요. 특히 광주는 아픈 역사를 겪으면서 스스로 위축돼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노래가 오로지 노래로서, 귀를 즐겁게 하고 나아가서는 시민들의 마음을 껴안는 예술로 제 역할을 다 하길 바라죠."
노래하면서 행복했다는 박문옥의 ‘답가’는 2017년 가을께 만나볼 수 있다. 그는 ‘데뷔40주년 기념 콘서트’를 계획 중이다. 무대는 소박하지만 콘텐츠는 알차게 준비할 생각으로, 요즘 신곡 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박문옥은 누구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1977년 MBC 제1회 대학가요제 동상(銅賞) 수상
·소리모아 스튜디오 대표
·‘소리모아 10년만의 외출’ ‘운주사 와불 곁에 누워’ ‘꽃잎 인연’ 등 음반 발매
·‘노래로 듣는 시’ ‘김원중 직녀에게’ ‘김정식 이슬처럼’ 등 연출
·‘무등아리랑’ ‘목련이 진들’ ‘호수’ 등 1000여곡 발표

박세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