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듯, 멈춰있고 또 멈춘 듯한 데 그 안에 움직임이 감지된다. 고요한 가운데 무게감 있는 한국무용, ‘정중동’(靜中動)의 매력이다. 현란한 몸짓, 화려한 기교는 없다. 다만 손끝에 ‘맛’을 담고, 발끝에 ‘멋’을 얹는다.
젊은 무용수 이반야(28)씨는 "큰 움직임 대신 구성진 몸짓이 펼쳐지고 그 끝엔 결국 내면을 파고드는 멋들어진 춤사위가 이내 마음을 잡아 당긴다"며 "지금껏 한국무용에 파묻혀 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별났다. 이씨는 그의 고모 다음으로 40년 만에 귀하게 얻은 고명딸이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콧노래를 부르는 것마저 금지됐던 엄격한 집안이었지만, 고명딸에게 만큼은 엄청난 특혜가 주어진다. 다섯 살 무렵부터 한 시도 가만있질 못하던 이씨는 늘 춤을 추고 다녔다. 밥 한 숟가락에, 춤 한 번이었다니 그가 보여준 예술적 끼는 말 하지 않아도 짐작된다.
이씨는 한국무용에 입문한 때를 초등학교 2학년 시절로 기억한다. 워낙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특기적성부에 한국무용반이 생기자 고민 없이 달려갔다. ‘특기’로 시작해 광주예술고, 중앙대 무용과를 거쳐 예능인의 길을 걸어 온 시간이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스승인 김덕수 선생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한국무용을 배운다. 무엇이 그렇게 끌렸냐는 질문에 그는 "정답이 없어서"라 말한다.
"한국무용에는 그 어떤 답도, 규정도, 객관적 잣대도 없어요. 예를 들어 피겨스케이팅이라고 하면 동작이 체계적으로 점수화 돼 있잖아요. 완벽한 기술을 소화했을 때 고득점을 맞는 것이고요. 하지만 한국무용은 그렇지 않아요. 물론 누구에게 사사 받았느냐에 따라 스타일은 있지만 누구에 의해서 담겨져 나오느냐에 따라 모두 달리 표현되거든요."
이씨는 ‘춤’이 자신의 몸으로 매개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바로 감정표현이다. 동작이나 춤의 구성도 중요하지만 최대한 내면의 감정을 발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특히 살풀이, 승무 등 전통춤을 쉬지 않고 해온 덕에 창작 춤을 춰도 한국무용 특유의 구성짐을 숨길 수가 없다. 그를 가르친 스승들도 모두 그의 춤엔 ‘무게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춤은 무거워야 제 맛"이라는 게 지론인 것에 비추면 이만한 칭찬도 없다.
그럼에도 젊은 무용인답게 ‘창작 춤’에 대한 갈증이 깊은 그다. 스승의 몸짓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전통춤은 그의 예술적 끼를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대학 시절, ‘신무용’이란 장르를 접하고 그는 춤의 보폭을 넓혔다.
"전통춤을 오래 하다 보니 어쩐지 회의감이 들었어요. 나 혼자 기뻐서, 흥에 취해서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그래서 눈물 쏙 빼도록 혼이 나면서도 새로운 동작을 짜보고, 춰보고 했어요. 전통춤이 대중과 조금 동떨어진 도도한 맛이 있었다면 창작 춤은 ‘주제’에 따라 몸으로 표현, 대중들과 소통하는 재미가 있죠."
이씨는 미술관 전시장 안에서도 춤을 췄다.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전시 작품을 보고, 이를 즉흥적인 몸짓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였다. 동양철학을 공부하셨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평소 생각해왔던 자신의 삶의 가치를 춤으로 녹여내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2016년 10월에는 국립 5ㆍ18민주묘지에서 열린 인권 운동가 홍남순 변호사 추모식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는 홍 변호사가 불교 신자였다는 것에 주목, 불교적 색채를 가미한 춤을 선보였다. 여러 가지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공연을 펼칠 때 마다 시대적 배경과 상황들을 고려한 춤으로 각색해 올린다. 춤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하루 10시간씩 춤을 췄어요. 학원에 문을 따고 들어가서 문단속을 하고 나왔으니 종일 춤만 췄죠. 그런데도 스승님께 정말 많이 혼났어요. ‘밥 먹고 이것만 하는 것이, 이것도 못 추냐’고 호통을 치셨죠. 부모님 말은 안 들어도 스승님 말은 잘 들었대요."
춤이 그렇게도 좋은 그였지만 잠시 이별했던 날들도 있었다. 이렇다 할 ‘정답’이 없는 것에 끌려 시작한 한국무용이었으나 모순적이게도 ‘정답’을 찾고 싶은 욕구가 이반야를 흔들었다.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란 의문에 직면한 것.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어느 순간 미워지더니, 이내는 꼴도 보기 싫어지더라고요. 최승희 선생처럼 누가 봐도 ‘뒤집어지게’ 잘 춰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소질이 없나 싶고 그래서 1년 반 동안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렇게 미웠던 춤을 다시 추게 된 이유를 묻자, "역시 딴따라는 천생 딴따라에요"라며 웃는다. 꼭 애인 같단다. 곁에 없으면 죽겠다 싶다가도, 어떤 날은 꼴도 보기 싫은 것과 같다.
1년 반 외도 후, ‘참 재미있어 죽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었으니, 외딴 섬에서 춤을 췄을 때다. ‘움직임예술정거장’이란 사업으로, 도서 지역 등 문화 소외 계층에 찾아가는 공연을 펼쳤다.
"공연예술을 처음 접하는 어르신들이 참 많았어요. 육지에 한 번도 못 나가봤다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분들 앞에서 춤을 추는데 정말 좋은 거예요. 한 할머니가 ‘내 생에 가장 좋은 날’이라면서 꼬깃꼬깃 접은 오천원을 건네시더라고요. 문화예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런 곳이구나 했어요."
그날의 에너지는 이씨의 ‘춤 인생’에 손꼽힐 만 한 무대였다. 중국, 대만, 우즈베키스탄, 네덜란드 등 해외 곳곳에서 한국무용을 선보인 그이지만, 그날의 감동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그를 춤추게 했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제 춤에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순 없다고 봐요. 이를 전달할 수 있는 내공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요. 동작이나 형태적인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냥 즐거우셨으면 해요. 내가 이 움직임에 ‘어떤 의미’를 표현한다고 관객에게 알아봐달라고 하기 보다는 보면서 흥겨우면 그만이겠죠."
움직임도 느리고, 발걸음도 더뎌서 부상은 없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발톱이 빠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몸 여기저기 멍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다. 맨 살로 바닥을 쓸어내리는 동작이 많은 탓에 상처가 나고 또 덧났다. 상처 위에 새 살이 나면서 무용수 이반야의 춤도 더욱 영글어 질 터.
그는 전통춤을 기반으로 시민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예술을 선보이고 싶다. 한국무용이 발레나 현대무용 등 다른 장르에 비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서다.
"현대 사회의 특성이기도 한 것 같아요. 더 빠르고,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한 것들에만 박수를 보내주잖아요. 시선을 확 끄는 것들이요. 하지만 우리 삶에 조용히 동행하고 있는 가치들도 있거든요. 묵묵하게, 꾸준하게 한국인 삶과 함께 해 왔던 한국 춤을 위해 열심히 춤추고 싶어요. 그게 제 역할이라고 믿고요."
이씨는 한국무용의 교육적 가능성도 높게 산다. 현재 ‘움직임연구소’에서 춤을 매개로 한 교육 콘텐츠 만들기에 열심이다. 아동센터, 소년원, 학교 밖 아이들 등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움직임’이 인간 정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외국에서 펼치고 싶은 일도 있다. 흔히 말하는 어학원처럼 해외 곳곳에서 ‘한국 춤 아카데미’를 열고 싶은 생각이다. 일회적인 공연을 펼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춤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무용을 계속하면서도 공부에 끈은 놓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내면이 텅 비어 있는 춤이 사람 마음에 가 닿기는 어렵거든요. 늘 열린 시각을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했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 어떤 일들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그는 장래희망을 적는 칸엔 늘 ‘인간문화재’라고 썼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얼마만큼 고된 길을 견뎌야 하는지는 몰랐다. 다만 춤이 좋았고, 인생의 전부라고만 믿었다. 지금도 그 꿈이 유효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긍정의 미소만 짓는다.
"막연했던 꿈이라서 구체적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엔 스승님이 대단해보이니까, ‘아 나도 스승님처럼 돼야지’란 것이었죠. 지금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내공이 필요한 지 알게 됐으니,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죠. 제가 그 길을 나란히 걷게 되는 날이 올까요?"

한국무용수 이반야는
·광주예술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무용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교육대학교 졸업
·제24회 전주 대 사습 놀이 무용부 장원
·2008년 일본 도쿄 오타구 도민회 초청공연
·제49주년 4·19 기념공연, 인천세계도시축제 개막공연 등

박세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