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火魔)로부터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소방관’은 힘들다. 예측불허의 화재현장에서 신속히 대처해야 하고 인명도 구출해야 한다.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대형 화재에 대비, 한시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다. 이 때문인지 이 직업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같은 편견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호남 소방역사’를 새롭게 쓰는 한 여성 소방관이 있어 화제다.
지난 1일자로 취임한 장경숙 (56)영암소방서장이 그 주인공. 호남 최초 여성 소방서장이다.
그는 전남도가 뽑은 첫 여성 소방 공무원이기도 하다. 1978년 전도 소방공무원 공채 2기이지만 이 때부터 여성이 소방공무원을 할 수 있었다.
목포소방서 소방 행정직으로 공직에 들어선 그는 처음에는 화재 현장에 배치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사무실에서 행정만 봤다.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 주도적인 업무보다는 보조적인 업무를 주로 맡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맡은 바 일을 ‘똑소리’나게 처리했다. ‘소방행정’과 관련된 법령, 규칙 등 ‘행정 전반이 머리 속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근무했다.
1984년은 의미있는 해였다. 행정 처리만 하던 그는 소방 안전시설을 점검하는 민원 업무를 맡으면서 일선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1만 1140㎡ 되는 대불 산단 공장들의 소방 시설 건축 설계를 맡아 지하부터 15층 물탱크가 있는 옥상까지 수십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완공될 건물에 여자가 먼저 들어오면 부정 탄다’는 편견들을 극복하는 게 더 큰 과제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건물 소방 안전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고 진짜 일할 맛이 났다"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 그의 열정은 이때부터 가속도를 탔다.
1999년 지방 소방위로 승진해 영암 삼호 소방파출소 소장이 됐다. 여성 최초 화재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전국 최초 현장대응단장이 된 것이다. ‘여성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하는 주변의 우려는 그의 신속한 대처와 따뜻한 리더십 앞에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했다.
"무안 한 축사에서 불이 나 밤 12시에 출동해 아침 7시까지 진압작업을 펼칠 때였는데 캄캄한 시골에서 불을 끄는 현장은 참 긴박했고 물 마실 틈도 없었다"면서 "하지만 모든 게 타고 있는 상황에서도 축사 주인이 고생한다며 10인분의 떡국과 물을 건네는데 가슴이 뜨거웠고 직업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생했다.
사실 목포에서 나고 자란 그의 꿈은 소방관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친척의 권유로 우연히 여성 소방관 공채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리곤 1978년 2월 1등으로 합격, 이듬해 6월 발령을 받았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소방관 제복은 나의 운명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집 전체가 소실될 정도로 불이나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때 알았다" 면서" 지금도 진압 작업을 펼칠 때 불을 끄기 위해 살신성인했던 그 때의 소방관들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학창시절 내내 우수반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성실하면서도 참 강단 있는 학생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78년 입사시험, 99년 3월 지방소방위· 2005년 7월 지방소방경· 2011년 12월 지방소방령 승진 시험에서 모두 ‘1등’으로 합격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소방간부 전 단계인 소방사·교·장까지는 심사를 통해 승진했기 때문에 여성이 서열에서 제외되기 일쑤였지만 소방위부터는 실력대로 승진 시험을 통해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었다" 면서 "이 단계부터 ‘멈추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공부했고 여성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선배로서 본보기가 돼야겠다는 일념이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가 모든 시험에 일등 성적을 거두며 멋진 기량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물심양면으로 도운 친정어머니와 남편이 있었다. 큰아들이 4살 때까지는 서울에 계신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직장·양육을 병행할 수 있었지만 둘째 아이부터는 어머니 도움이 없이 버거운 순간이 많았다.
"‘한번 시작 한 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는 다짐으로 두 아들을 새벽 6시 30분께 기저귀 수십 개, 우유병 6개씩을 싸서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겼고 남편은 학교 근무가 끝나면 아이들을 찾아 저녁을 먹이는 등 전적으로 도와줬다"고 말했다.
1998년 12월에 있었던 소방위 승진시험을 준비할 때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그는 1년간 오후 6시에 직장이 끝나면 당시 소방서 3층 조그만 창고에서 밤 12시까지 공부했다. 새벽 공부가 끝나고 데리러 온 남편, 아들과 작은 포장마차에 앉아 국수를 먹으며 “엄마는 공부하느라 늦게 오는 것이다”며 어린 아들을 이해시키기도 했다. 집에서는 설거지하는 시간도 아까워 소방법령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싱크대 문짝, 화장실 벽 등에 붙이고 암기할 정도로 열심히 하는 그 였다.
그러나 이렇게 강인한 집념을 가진 그에게도 두 아들의 엄마로서,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한 인간으로서의 갈등은 늘 존재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 놀고 있던 초등학생 큰 아들의 다리가 ‘새 다리’처럼 다른 친구들보다 가냘프고 야윈 모습을 보고 ‘내가 일한다고 먹을 것을 못 먹여 저러나’하는 죄책감에 휩싸였다”면서 이 후 아들들에게 “‘엄마가 소방관 그만 두고 너희와 계속 함께 있어줄까?’라고 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아들의 답변은 단번에 "NO!"였다.
스승의 날마다 소방관 제복을 입고 교실에서 일일교사를 하던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본 두 아들은 "엄마처럼 불을 꺼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냥 ‘소방관 엄마’로 있어 달라"고 말한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서울에 계신 친정어머니에게 다시 SOS를 요청했고 지금까지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38년 6개월 한 길을 달려온 그에게 남은 임기는 3년 6개월. 그는 남은 임기는 ‘지역민의 소방 안전’ 과 ‘행복한 직장 만들기’ 에 주력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먼저 "13개 전남 지역 소방서 중 영암(9번째로 개설)소방서가 규모가 가장 작은데 작지만 가장 강한 기관으로 꾸려가는 게 목표다"면서 "이 세상에 똑같은 화재는 없는 것처럼 평상시 철저한 훈련을 통해 교육하고 군민 대상으로 소방 예방 활동도 견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개인 행복이 최고의 행복은 아니다. 더불어 공동체에서 행복을 느낄 때 최대 행복이다’는 그의 삶의 모토처럼 따뜻한 리더쉽으로 양방향 소통하는 열린 분위기 속에서 행복하게 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장 서장은 소방행정발전유공·친절우수 공무원 ·,소방관서 종합평가 최고상 10여회 수상과 함께 지난 2005년,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한 바 있다.

박사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