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과 건반, 드럼이 한 무대에 오른다. 묵직한 콘트라베이스는 곱디고운 가야금 선율을 든든히 받쳐준다. 곡의 장르로 치자면 ‘퓨전국악’이라 하겠다. 국악기와 클래식·재즈 선율의 합집합이다.
다만 홍윤진 가야금 연주자가 지향하는 음악 색을 단순히 ‘퓨전’ 장르로 소개하기에는 어쩐지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국악기와 국적 불문한 ‘장르의 앙상블’이라기보다는 각기 매력적인 악기들이 뽐내는 ‘선율의 앙상블’이기에 그렇다.
"국악기와 콘트라베이스, 기타, 건반 등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는 거죠. 국악기가 전혀 다른 악기들과의 섞이면서 국악기만의 매력이 돋보여요. 국악기로만 구성된 연주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색다른 소리가 다채로운 악기 구성에서 또 다른 매력으로 빛을 보는 거죠."
홍 연주자는 자신의 음악을 ‘한국형 월드뮤직’이라 소개한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흡수하는 음악을 선보인다. 그가 이끌고 있는 ‘루트머지’의 음악을 들어본 이라면, 그가 말하는 ‘한국형 월드뮤직’이 어떤 색인지 가늠할 수 있다.
루트머지는 2008년 결성된 단체다. 올해 창단 10돌을 맞았다. 가야금, 콘트라베이스, 건반 세 연주자들이 모여 첫 발을 뗀 것이, 이제는 어엿한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악기 구성도 늘었다. 기타, 드럼, 해금, 대금 등 정식 단원만 12명이다.
창단 초기에는 그야말로 ‘열린 음악’을 지향했다. 국악기와 어울리는 음악을 찾고자 다양한 나라의 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매년 꾸준히 정기연주회를 열고 자신들의 음악을 선보였다. 그들의 공연은 일종의 시험무대와 같았다. "이런 음악은 어떤가요?"라고 대중들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루트머지만의 색을 찾아갔다. 홍씨는 "아직 완전히 찾은 것은 아니고, 여전히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루트머지란 이름을 내건 앨범도 발매했다. 디지털 싱글 ‘바람의 노래’를 비롯해 ‘루트머지’, ‘아이야’, ‘Tic Tac’, ’법고창신’ 등이다. 루트머지 창작곡들 중 특히 사랑받은 곡들만 추려서 낸 작품집이다. 앨범마다 각기 다른 콘셉트를 지녔는데, 특히 ‘아이야’란 앨범은 국악태교로 호응을 얻었다. 특히 홍씨는 앨범의 ‘기록성’에 의미를 둔다.
"앨범을 내고자 한 이유가 우리의 음악을 기록하고 싶어서예요. 공연에서 연주하는 것은 무대가 막을 내리면 끝나잖아요. 그래서 대표곡들을 앨범에 담았어요. 실제로 해외 연주회에 참가 신청을 하더라도 그쪽에서 묻는 것이 루트머지란 이름으로 발매한 앨범이 있냐는 것이거든요. 뮤지션으로서 전문성을 가지고 발을 넓히기 위해서도 앨범 발매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명함 같은 것이죠."
‘바람의 노래’는 루트머지 노래 중 대표곡으로 꼽힌다. 건반과 가야금 선율의 아름다운 하모니,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함에다 퍼커션의 경쾌한 리듬이 인상적이다. 2008년 창단과 함께 제작돼 지금까지 공연 때 마다 가장 큰 호응을 얻는 곡이다. 독립영화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를 비롯해 방송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활용된 작품이다.
홍씨는 지난해 11월 개인앨범도 발매했다. 앨범명은 처음 먹은 마음을 잊지 말자는 뜻을 담은 ‘물망초발심’이다.
그의 가야금 연주의 특징은 ‘여성스러움’이다. 그를 가르치던 스승들은 늘 ‘편안하고 부드러운 소리’라고 칭찬했다. 홍씨의 차분한 성격이 가야금 연주에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다. 부드러운 소리라고 해서 연주의 고됨이 덜한 것은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입문해 지금껏 가야금을 타면서 수백 번 굳은살이 배고 또 터졌다.
산으로 들어가 가야금만 연주하는 ‘산 공부’도 여러 번 했다. 늘 가야금을 끼고 살면서도 그는 다른 국악기를 배우는 데도 욕심을 냈다. 국악기 연주자라 하면, 장단도 칠 수 있어야 하고 소리도 한 자락 뽑을 수 있어야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거문고를 부전공했고, 판소리는 물론 장구 가락도 제법 칠 줄 안다. 그가 다채로운 악기로 하모니를 만드는 루트머지를 이끄는 데 이 같은 경험들은 든든한 밑천이 됐다.
가야금에 입문해, 지금껏 홍씨의 목표는 명확하다. ‘이 시대의 산조’를 만들겠다는 것. 그가 주창하는 ‘이 시대의 산조’는 과거에 ‘산조’가 대중적으로 즐겼던 음악인 것처럼 오늘날 늘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신(新) 산조’ 개념이다. 이를테면 산조의 제2의 대중화다.
"산조는 끝이 없어요. 한 바탕에 한 시간 정도인데 10번을 타면, 10번 모두 다르게 연주되죠. 기본적으로 선생님들의 산조를 바탕으로 연주를 하는데도 늘 달라요. 자기감정이 실리고, 연주자만의 특색이 가야금에 묻어나기 때문이죠. 끝이 없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정답이 없고, 열려있는 장르라는 것이죠. 루트머지는 ‘이 시대의 산조’를 만들어 대중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그게 젊은 국악인들의 역할이라 믿거든요."

홍 연주자는 전통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예술인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 국악을 보존·계승할 필요가 있는 ‘약한 것’이라 보는 것에는 동조할 수가 없다. ‘우리 것을 지키자’ ‘보존하자’는 구호 자체가 전통을 이미 지나간, 소수의 문화로 한계 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전통 국악은 있는 그대로, 좋은 음악이에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죠. 하지만 이를 전통이란 틀에 스스로 가두는 것은 옳지 않아요. 전통 국악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야 지나간 유행과 같은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대중음악이었거든요. 선조들의 삶과 함께했던 것 처럼요. 때문에 나서서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 것 보다는 전통 국악에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방법이 될 것 같아요. 국악기에 늘 맞춤한 옷을 입혀보는 것이죠."
국악에 대한 시각은 광주MBC와 함께 일하면서 폭 넓어졌다. ‘난장‘과 ‘우리가락 우리문화’의 음악감독 및 자문 역할을 하면서 국악 팀들의 변화무쌍한 음악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해외 공연도 여러 차례 나갔다. 중국, 인도, 멕시코 등 에서 국악 공연을 선보였다. 한국인 뿐 아니라 현지인들의 응원도 많이 받았다. 오히려 외국인들은 어떤 편견도 없이 들어주기 때문에 박수 소리가 더 힘차다 한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 하는데, 홍씨도 마찬가지다. "타국에서 ‘아리랑’을 연주해 보지 않으면 그 감동은 절대 알 수 없다"고 자랑한다.
요즘 홍씨는 가을께 펼칠 10주년 기념 콘서트 준비에 분주하다. 10년 루트머지를 이끌어 온 홍씨를 위해 절친한 친구들도 나선다. 문화매거진 ‘청춘’ 발행인인 한경숙씨와 펭귄마을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정광림 작가가 팔을 걷어붙였다. 세 명의 예술인이 잡은 테마는 ‘어린왕자’다. 10년간 다양한 음악을 하며 자신만의 음악 색을 정립해 온 루트머지가, 이 별 저 별 떠돌며 인생의 가치들을 깨달은 어린왕자의 여정과 같다는 데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한경숙 발행인이 스토리텔링을 하면, 홍씨는 음악을, 정광림 작가는 미디어아트를 선보일 계획이다
어떤 무대로 꾸미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체험형 콘서트’라 한다. 공연장에 온 관객들이 무대만 보다 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즐길 수 있는 체험 존을 꾸밀 생각이다. 악기를 실제로 배우고 연주해보고, 이를 사진·영상물로 남길 수 있다. 10년 꾸준히 사랑해 준 시민들을 위한 이벤트도 공연 마지막 순서로 공개된다. 어떤 이벤트로 준비중이냐 물으니, "깜짝 놀랄거예요"라고 운만 뗀다.
올해 또 그는 가야금 공부도 더 하고 싶다. 뿌리가 깊고 단단해야만 어떤 새로운 장르로 도전했을 때도 끄떡없이 좋은 소리를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말하자면, 내공 깊은 소리를 낼 때도 됐다는 것이다.
"그 나이에 맞게 낼 수 있는 소리가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줄을 타는 기술이 좋죠. 손이 재빠르고요. 이제 40대에 들어섰으니, 그에 걸맞게 가야금을 타고 싶습니다. 연륜이라 하기엔 쑥스럽지만 세월에서 묻어나는 소리가 있잖아요. 깊이가 있어서 가슴을 울리는, 맛깔나는 연주를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가야금 연주자 홍윤진은
-광주예술고등학교 졸업
-전남대학교예수대학 국악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하근, 송영란, 정현숙, 성애순 사사
-MBC문화콘서트 ‘난장’·우리가락우리문화‘ 음악감독
-(사)최옥삼류가야금산조보존회 회원
-광주가야금 연주단 단원
-(사)한국가야금연주가협회 회원
-월드뮤직그룹 루트머지 대표

박세라 기자·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