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보다 강하다 했다. 언론·저술·정보의 전달은 직접적인 폭력보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그런데 펜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무뎌진 펜’ 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니 바로 ‘놀이’다.
사회를 향한 날선 메시지에다 유희적 요소가 더해지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다. 농인 것 같으면서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맛이다.
풍자와 해학은 이처럼 유연하여서 강한 탄압을 어렵게 만드는 애매모호한 힘이 있다. 놀이판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광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다가는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빈다’는 핀잔을 듣기에 꼭 알맞다. 억압과 탄압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는 놀이만의 강점이다.
놀이패 ‘신명’은 사회적 어젠다를 마당극에 녹여 선보여 온 단체다. 고구마 값 폭락·돼지 값 파동 등의 농촌 문제부터 노동자·민주화·인권·여성 문제까지 날카로운 사회 비판의 창구 역할을 해 온 셈이다.

△사회 이슈 다뤄…전라도 마당극 방향성 정립
놀이패 ‘신명’의 역사는 곧 광주문화예술단체 문화운동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978년 봄, 전남대 탈춤반 민속문화연구회와 연극반이 이 지역에서 최초로 마당극 ‘함평고구마’를 공연한다. ‘함평고구마’는 1976년부터 1년여에 걸친 함평 농민들의 고구마 수매싸움을 다룬 작품이다. ‘함평고구마’는 공연예술이 어젠다와 현장성을 강하게 담보, 전라도 마당극의 방향성을 드러낸 작품으로 꼽힌다.
실제 1980년 1월 ‘함평고구마’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극회 ‘광대’를 조직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작품은 지역 문화예술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쉽게 말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마당극을 선보이는 것으로서 문화예술의 ‘사회참여’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인 ‘한씨연대기’ 공연 준비를 하던 ‘광대’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바로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이다.
공연 연습에 몰두하던 대다수 단원들은 5‧18이 터지자 지도부 홍보부로 참여한다. 격동의 현대사 한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술하던 젊은이들이 민주화 깃발을 흔들고, 시위를 주도하자 그 대가는 처절했다. 돌연 수배자가 됐고, 계엄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이들도 늘어났다. 자연스레 극회 ‘광대’의 활동은 크게 약화됐으나 문화운동에 대한 열망은 더욱 고조됐다.
1981년 5월 5‧18항쟁 당시 중심이 됐던 도청 앞 YMCA 체육관에서는 5‧18 1주년을 맞아 광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이 오른다. 바로 ‘호랑이 놀이’가 그것이다. ‘호랑이 놀이’는 호랑이 탈을 쓴 미제국주의자와 이승만, 전두환 정권에서의 민중들의 저항과 지배세력의 탄압을 꼬집는 작품이다. 엄혹한 시대 상황 상, 우회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됐지만 한국현대 정치사의 어둔 부분을 형상화 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각 대학의 정치적 소재의 마당극 공연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광대는 회원이던 윤만식을 중심으로 신명으로 탈바꿈,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신명’은 문화운동에 관심을 둔 지역 예술인들이 주축이 돼 극회 ‘광대’의 활동을 그대로 이어 받은 단체다. ‘신명’은 1982년 창립기념공연으로 의병장 안규홍장군 일대기를 담은 마당극 ‘안담살이 이야기’를 올림으로써 그 탄생을 알렸다.

△공연판이 ‘집회 현장’…사회 부조리 ‘직시’
광주 지역의 마당극은 대학가에서부터 시작됐다. 민족 문화를 계승, 전통 연희를 선보이자는 움직임이 언제 어디서나 ‘판’을 벌이는 마당극 형태로 분출 된 것이다. 여기에다 전통 연희가 갖는 풍자와 해학의 가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됐다.
실제 마당극은 사회극이라고 하기도 하고, 더 강하게 말해서 정치극·선동극이라고도 규정한다. 실제 ‘함평고구마’의 경우 공연이 끝나면, 공연자들은 물론 이를 지켜보던 시민·농민들이 모두 시위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공연 자체가 하나의 집회이자, 시위였던 셈이다. 이 같은 ‘운동적’인 힘에는 ‘탈’이란 장치가 크게 작용한다. 탈춤은 예부터 사회 지도층을 풍자하고 우회적으로 비판, 민중들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탈을 쓰고 펼쳐지는 마당극은 부조리한 시국을 꼬집고 사회적 이슈를 알리는 매체로 적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당극이 정치권력의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놀이패 ‘신명’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공연을 마치고서 곧장 경찰서로 직행한 적도 여러 번이라니, 그 엄혹했던 시절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정찬일 놀이패 신명 대표는 “당시에는 공연자들 한 명 한 명이 1인 미디어이자, 뉴스였다”며 “기성언론을 통해서만 정보를 받아보던 시민들은, 또 다른 사회적 소통의 창구로서 마당극을 구경했고, 나아가 공연의 ‘가담자’로서 함께 뜻을 모았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했다.
요즘처럼 SNS 등의 미디어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마당극은 말하자면 ‘작은 언론’이었다. 뉴스에서 다뤄주지 않는 농민·노동자·민주·인권 등의 이야기를 마당극으로 펼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당극이 갖는 ‘현장성’과 ‘즉흥성’은 한 번 송출되면 바꾸기 어려운 매체의 견고함에 견줘 살아있는 소통·교류의 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저들’(공연자)이 해줌으로써 작게나마 민중들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명, 우리네 ‘삶’ 파고들다
놀이패 ‘신명’의 대표작은 역시 5‧18을 다룬 ‘일어서는 사람들’과 ‘언젠가 봄날에’다. 먼저 ‘일어서는 사람들’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1988년도 작품은 5‧18 그날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어 1997년도에 각색된 것은 당시 광주시민들의 위대한 공동체성이 마당극으로 승화됐다.
5‧18 30주년 기념작인 ‘언젠가 봄날에’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은 행방불명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2014년 터진 세월호 사건과 일맥상통하면서 비극적이게도 그 생명력을 이어 가고 있다.
이제, 신명은 거시적인 이슈보다는 일상적 삶을 들여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가벼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미시적인 주제들이 다뤄지다 보니 오히려 더 진중한 메시지가 드러난다. ‘숲속나라 꼬마 삼총사’, ‘무지개 뜨는 교실’, ‘바리공주 아리랑을 노래하다’ 등 청소년‧여성‧환경 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띈다.
또 시민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기기 위한 정기 공연도 11월까지 진행된다. 신명은 매달 남광주 푸른길 공원 일대에서 ‘언젠가 봄날에’, ‘꽃 같은 시절’, ‘술래소리’ 등의 마당극 상설공연과 지역 주민과 함께 만드는 ‘공동의 땅 공동의 녹지’ 연극을 선보일 계획이다.
엄혹했던 시절을 함께 견디어낸 예술단으로, 신명이 짊어 진 책임감은 여전히 무겁다. 정 대표는 “꼭 종갓집 같다”고 표현했는데, 참 적확하다. 놀이패 신명은 신명 단원들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적 공공재가 된 셈이다.
문중의 큰집을 어떻게 바로 이어갈지 묻자, “신명다운, 신명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짱짱히 맞서고 싶다” 한다. 언제 어디서든 판을 깔았던 지난날 신명의 당참이, 소외받은 사회 약자들을 보듬었던 따스함이, 오래도록 판을 벌이길 바라본다.

박세라 기자

박세라 기자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