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중견이나 원로 작가의 전시에만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던 패턴에서 모처럼 탈피해 미래 광주화단을 이끌 젊은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길은 기대반, 우려반이었다. 풋풋하지만 무르익지 않은, 그래서 설익은 듯한 젊은 화가에 대한 낯설음이 확신으로 바뀌면 어떡하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성초등학교 4거리에서 월산 로터리 쪽으로 진행하다 보면 그 중간쯤에 젊은 작가군에서는 꽤나 활발하게 활동중인 설박(33·박설)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해 있다. 어지러진듯 하면서도 가지런한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회화에 관한한 자기색깔과 소신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걱정은 우려에 불과했다.
그는 꾸준한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작업하다가 시들해지는 작가가 아닌, 지속적으로 활동을 끌고 가는 작가 말이다. 금방 불타오르는, 휘발성의 것보다는 오랫동안 심지를 태우는 불꽃같은 작가적 성향에 가깝다는 나름의 해석이 가능해졌다. 그는 적어도 금방 바람에 꺼지는 불꽃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분야든 롱런하기가 힘들잖아요. 제가 변화시기인데 조금 정체기이자 터닝포인트를 맞았습니다. 더욱 더 단단한 작가로 롱런하고 싶죠. 나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되는 게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부진 포부를 가진 작가는 젊은 작가로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전업작가로 창작에 매진하고 있어서다. 매일 나주에서 광주작업실을 오가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힘든 작업 과정들 때문에 화가로서의 보람 역시 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운이 좋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꾸준히 활동을 하다보면 길이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 다행인 점은 작업실을 인스나인이 무료로 후원을 해줘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월세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화가 국내에서는 비주류로 취급되지만 외국에서는 신선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한국, 더 나아가 광주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계속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이런 저런 어려움 때문에 활동공간을 아예 서울로 옮기는 유혹을 받지 않았느냐에 대한 물음에 대해 그는 강한 어조로 광주가 젊은 작가들에게는 더 활동하기 좋은 곳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초반에는 서울로 활동공간을 옮겨볼까 하는 유혹이 있었지만 지금은 굳이 서울로 안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서울은 작가들도 많지만 작업실 등 여건이 어려워지죠. 광주가 오히려 작업하기 편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활동도 많이 할 수 있는데다 작가들간 커뮤니티도 구축돼 있잖아요. 소통도 잘 되구요. 지역에 있지만 서울에서 전시를 열 수 있습니다."
그는 작가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작업 성과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런 그에게 ‘한국화를 어떻게 선택했을까’를 물었다. 그의 부친은 ‘참새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가 시원 박태후씨다. 그래서 부친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한국화에 대한 기억이 축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도 부친의 영향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서양화보다는 먹을 먼저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경쟁자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그는 아버지가 많은 응원을 잊지 않는다는 전언이다.
아버지가 작가다 보니 다른 작가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시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지금 잘 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시고 격려를 많이 해 주시죠. 저도 유년기부터 아빠의 그늘이 커서 벗어나보자 욕심이 컸었습니다. ‘너 어떻게 해라’가 아니라 다 수용해주고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바라봐주셨죠."
또 미술환경이 대내외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기억해주는 관람객들 때문에 보람을 느낀다고 밝힌다.
아무래도 작품을 보고 관람객들이 기억해주고 진심어린 느낌을 말해주면 보람이 된다는 그는 전시를 해도 보는 사람은 한정돼 있는 만큼 기억과 공감, 좋아해주면 좋다는 반응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게 쉽지는 않은데 공감을 얻었을 때 작가로서의 보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작가가 늘 보람을 얻을 수는 없다. 그도 작업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는 여행으로 그 답을 얻는다고 한다.
"저는 미술 아닌 분야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죠.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게 영감을 얻기 위한 저만의 방법이에요. 다른 활동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와 생각을 받으려고 합니다. 다양한 경험, 특히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요. 사실 한군데만 보면 시야가 좁아져 위험해지지 않겠어요."
여행까지 창작의 연장선상에서 활용하는 작가에게 늘 고민처럼 떠러붙는 명사는 변화다. 어느 예술가이고 변화야말로 가장 어려운 숙제의 하나다. 작가 역시 안주하거나 정체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먹으로부터 출발하고, 먹으로부터 답을 얻는다. 결국 먹으로 시작해 먹으로 끝맺음하는 그의 작업은 단촐한 듯 보이지만 꽤 심오한 사유들을 투영해낸다. 그는 5∼6년전부터 콜라주 기법으로 먹을 한다. 지금은 먹으로만 작업한다. 현재를 터닝포인트로 생각한다는 그는 대학시절에 책색도 하고, 먹 작업도 했지만 다시 온전한 먹의 세계로 돌아와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전시도 줄였다.
사실 먹 작업을 하면서 많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회화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으로 진단한다. 평면도 해보도, 설치 등도 섭렵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갈 작정이다.
다만 독립큐레이터 그룹 오버랩(OverLab·대표 김선영)이 추진중인 한국과 필리핀 교류전에 참여해 작업 중이다. 필리핀 작가들 3명이 6월 중순부터 광주에 와서 작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8월1일부터 7일까지 전시를 갖는다. 그리고 9월에는 작가가 필리핀 현지에 머무르며 두달 동안 작업을 펼칠 계획이다.
이 오버랩의 교류전은 작가에게 작업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일정 변화의 계기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왜냐하면 미술분야라고 하는 한 분야에서 같아 보이지만 그 나라의 특성, 새로운 문화 등을 느끼고, 서로 알아가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작품을 보면 선명한 여백과 만날 수 있다. 앞쪽에서는 산수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뒤로 갈수록 여백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2013년 서울 송은아트큐브에서의 개인전때 터닝포인트를 마련해줬던 작품 ‘Certain Scenery Series lnk’를 보면 그가 추구하는 여백미를 느껴볼 수 있다.
"우리네 삶 역시 비움과 채움을 잘해야 하는데 비우는 게 훨씬 더 어렵죠. 작품 또한 비우는 게 더 어렵습니다. 많이 집어넣는 것보다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여백처럼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이나 삶 모두 여백은 같은 맥락이겠죠."
마지막으로 소재의 확장 등 작업의 방향에 대해 언급했다.
"산을 주제로 해왔는데 제 자신을 작업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제가 작업을 하면서 직설적인 것을 피했는데 기회가 되면 보여주기 어려워했던 나의 것들을 제시해나갈 계획입니다. 또 화선지와 먹에 한정돼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영역을 좀더 넓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