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에 앉으면 곧 자유가 펼쳐진다. 음표 빽빽한 악보는 없어도 그만이고, ‘잘 준비된’ 연주자만이 필요하다. 손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즉흥적인 선율을 창조해낸다. 새어나오는 한 음 한 음이 곧 연주자의 마음이자, 또 하나 작품의 탄생이다.
그래서 재즈피아니스트들은 대개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꿈꾸는 세계는 ‘자유’이거나 ‘자유’에 다가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때론 직업병처럼 자주 감상에 젖기도 하고, 그저 바라다 본 풍경에서 악상을 건져 올리기도 한다. 그들의 시각, 느낌이 그대로 예술적 영감이 되기 때문.
재즈피아니스트 강윤숙씨는 피아노로부터 주어진 ‘자유’를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입문, 호신대학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그이지만, 재즈피아노 연주의 이 같은 매력이 그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정확하게 그는 "재즈로 전공을 바꾸면서 조명을 받으며 연주하는 즐거움을 맛 본 것 같다"고 말한다. 강 피아니스트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아마도 ‘악보’를 바라봄에서 ‘관객’과 눈 맞춤 할 수 있게 된데 따른 것 아닐까.
클래식 피아노는 위대한 작곡가가 낳은 ‘세계’에서 연주자가 저마다의 역량을 펼친다. 악보를 재해석해 내는 능력, 깊이 있는 연주 실력, 연주자만이 가진 풍부한 음색 등에서 관객들은 감동한다.
반면 재즈피아노는 ‘즉흥성’이 특징이다. 하나의 ‘코드’만으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또는 온종일도 연주가 가능하다. 즉흥적 연주이다 보니, 지금 현재, 바로 이곳에서 느낀 연주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클래식피아노가 내적 완성도를 위해 ‘꾹꾹’ 누르는 연주를 선사한다면, 재즈는 외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관객과 소통한다.
그렇다 보니 내향적이던 강 피아니스트의 성격 또 외향적으로 변화했다 한다. 슬픔과 기쁨 따위의 온갖 감정을 연주로서 내보이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탓이다.
"연주에 가장 포인트를 두는 것은 바로 감정선이에요. 테크니컬 한 기교는 둘째이고, 우선 감정이 드러나야 하죠. 감정이 흐르는 선율에 관객들의 마음은 동할 것이라 믿습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슬프면 슬픔이, 즐거우면 즐거움이 전달되는 연주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즉 마음의 노래를 들려드리는 것이죠."
그래서 재즈피아노 연주에는 좋다 혹은 나쁘다란 평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연주자의 개성과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 연주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마음이 ‘동(動)’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운 좋게도 연주와 관객이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의 온도가 맞아떨어진다면 더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게 재미다. 연주자가 선율에 담은 생각을 읽어내는 것도 재즈피아노의 감상 포인트가 되겠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재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질서’ 한 것은 아니다. 자유로움 속에 엄격한 규율이 존재한다. 블루스를 예로 들자면, 블루스의 기본 12마디 4분의 4박자 패턴을 정확하게 지켜서 연주해야 한다.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자유 안에 규율이 있다는 것, 이는 바꿔 말해 음악적 기본이 튼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초를 알아야만 변주도 가능하고, 테마 편곡도 가능한 것이다.
재즈피아니스트들은 클래식으로 접하다가 전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음악적 내공은 여느 연주자 못지않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해 온 강 피아니스트는 교회 예배반주를 하다가 재즈의 세계로 입문한 케이스다.
"재즈피아니스트들의 90%는 아마 교회 예배반주를 하다가 입문했을 거예요. 반주를 하면서 코드를 접하게 되고, 코드와 리듬에 욕심을 내게 되죠. 그게 참 재미있거든요. 대학교 3학년 때 재즈 피아노 코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그는 먼저 정통 재즈를 공부했다. 재즈를 하려면 꼭 마스터해야 하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후에는 클래식 테마곡을 재즈로 편곡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간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한 데서는 시도해보지 못한 리듬·멜로디에 변화를 가했다. 거장 작곡가에게 감히 ‘도전’한 것처럼 짜릿함에 전율이 일었다. 재즈가 선사하는 묘미였다. 영화음악과 민요·판소리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정통부터 퓨전까지 전 과정을 훑은 후에는 결국 ‘자작곡’에 공을 들인 그다.
역시 자작곡 연주에 가장 마음이 끌린다. 마음에 있는 노래를 표현할 수 있어서다. 그의 자작곡은 서정적이거나 완전히 신나거나 한다. 전자는 강 재즈 피아니스트의 본 감성에 더 가깝고, 후자는 관객과 함께 어우러지기 위한 그의 장기다.
진로를 바꾸면서 그가 주목한 것은 세상의 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는 재즈피아니스트의 자질로 청음력(聽音力) 즉, 소리를 알아듣는 능력을 꼽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소리를 듣고 피아노로 모방해 연주하는 능력이다. 가령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이를 그대로 표현한다든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트럼펫 소리를 듣고 똑같이 리듬을 잡아내는 일이다.
강 피아니스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편곡해 재즈 테마로 연주, 관객들을 만나오고 있다. 2003년 그가 결성한 연주단체 ‘강윤숙의 재즈여행’은 재즈가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자 하는 그의 움직임 중 하나다. ‘강윤숙의 재즈여행’은 그와 드럼·베이스 등과 어우러져 영화음악·국악·클래식 편곡 등의 연주를 선사한다. 귀에 익숙한 음악들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재즈는 참 다양한 악기와 융합이 잘 되는 것 같아요. 연주 하면 할수록 그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을 느껴요. 앞으로는 ‘포엠콘서트’를 열어보고 싶어요. 시 언어를 멜로디 화 해 보고 싶은 욕심이죠. 제 마음을 담은 자작곡을 모아 개인음반도 내년 1월 발매를 목표로 준비 중에 있어요."
그는 세상을 악보를 보듯 바라본다. 사람들이 지나는 거리, 푸른 하늘, 그리고 카페의 조명 하나까지. 모두가 그의 뮤즈다. 특히 강 재즈피아니스트는 계절적 변화에서 음악적 영감을 가장 많이 얻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기 다른 온도와 풍경 그리고 색채가 선율로 표현된다. 그가 늘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유다.
"재즈 음악을 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긍정적인 것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클래식을 할 때는 늘 마음 한편이 무겁고 어두움이 있었다면, 재즈를 한 후로는 한층 밝아졌어요. 제 삶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이죠."
사실 연주자가 자신 삶에 애정이 없으면 재즈를 하기 힘들다. 연주가 곧 ‘작곡’인 장르의 특성상 연주자 본인의 자아가 명확하지 않으면 음악을 이끌어 갈 힘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즈피아니스트라면 자존감, 자기애, 그리고 자기만의 색채가 명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강 재즈피아니스트가 느끼는 자신의 색깔은 파랑과 빨강이다. 밝고 강한 색이다. 개성 짙은 그의 연주가 앞으로도 계속된다.
"재즈 피아노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죠. 홀로 고독한 연주가 아니라 다른 연주자와 눈을 맞추고, 관객들의 환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강윤숙 마음의 화두를 관객에게 내보이고 싶어요. 세상의 온갖 소리들을 재즈 선율로 더 아름답게 들려드릴게요."

박세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