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이란다. 잘 담가진 장맛이 모든 음식 맛을 좌우하듯, 심금을 울리는 연주 또한 이 손맛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무릎이 탁 쳐진다. 그간 많은 예인들을 만나 수도 없이 물었던 "좋은 소리란 어떤 것입니까?"에 대한 해답을 찾은 듯해서다.
진부한 질문에 이 같은 ‘현답’을 내려준 이는 성애순(전남대 국악학과 교수)가야금 명인이다. 지난달 1일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방학이라 학생들은 보이질 않는데 성 교수는 홀로 분주했다. 일주일에 한 번 여는 여름방학 특강 준비 때문이다. 방학인데 쉬시지, 란 기자의 말에 "우리 제자들 손이 쉴까봐…"라면서 웃는다.
늘, 꾸준히, 매일, 부단히, 인내심을 갖고 연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오랜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손맛’ 또한 이 같은 끈질김에서 나올 터.
성 교수는 올해로 가야금 한길을 걸은 지 꼭 50해를 맞았다. 열세 살에 가야금을 품에 안은 후, 반백년을 지나온 것이다. 그간의 세월, 성 교수의 가야금 맛은 건강하게 숙성된 장맛처럼 깊은 맛이 들었겠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참 좋아했어요. 집에 오르간이 있었는데 배우지 않았어도 곧잘 쳤죠. 오른손으로는 멜로디를 치고, 왼손으로는 느낌대로 화음을 짚었어요. 교회 성가대 반주를 도맡았고, 학생회 활동하면서 합창대회도 나갔죠. 그냥 마냥 음악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는 형제가 열 명인 다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 중 귀여운 막내였는데, 하도 노래를 하고 다니니까 형제들 사이에서 여간 타박도 받았단다. 눈총을 피해 화장실서 20분이고 30분이고 온갖 노래를 했다니, 그의 음악 사랑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런 그가 국악에 빠진 것은 순천여중에 입학해서다. 당시 학교에는 국악반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예쁜 선생님이 다소곳이 앉아 가야금을 뜯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한다. 선생님을 쫓아다니면서 소리도 배우고 가야금도 배우기 시작했다.
음악적 기량은 넘치고, 좋아하기까지 했으니 가야금을 전공으로 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터라 딸이 국악계 길을 걷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국악이 너무 좋아서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다. 집에서 연주를 못하니, 나무에 못을 박아 줄을 걸고 튕겼다. 누구도 막지 못한 국악 사랑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광주에서 열린 국악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담임선생님까지 나서서 ‘국악 시키자’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결국 부모님들은 막내딸의 뜻을 받아드렸다.
그는 한양대 음악대학 국악학과에서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다. 가야금 사랑이 깊은 만큼 공부에 대한 열정도 남다른 그다. 당시 대학원에 진학할 때는 "여자가 무슨 대학원까지…"라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도 이겨내야 했다. 비싼 전형료는 어머니가 대학교 졸업 선물로 사준 목걸이를 몰래 팔아 마련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기에, 제 힘으로 끝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대학원 졸업 이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거기서 만난 평생의 짝이 심인택 우석대 교수다. 해금 연주자였던 심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아들·딸을 뒀는데 모두 부모의 음악적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아들 상욱씨는 가야금과 지휘를, 딸 상윤씨는 판소리를 전공했다. 특히 어머니의 가야금 소리를 좇았던 아들은 그 만큼이나 가야금 사랑이 대단했다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집으로 가면, 아들이 버티고 있었어요. 침대에 누우면 가야금을 들고 와서는 레슨을 해주라고 했죠. 쉬고 싶은데 짜증이 나기도 했죠. 그런데 꼭 엄마 가야금 소리를 배우고 싶다면서 천원, 이천원 레슨비까지 쥐어줬었어요."

수많은 공연 중 가족과 함께한 ‘명인 가족 초청 음악회’는 가장 가슴 뿌듯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애제자 이자, 사랑하는 아들인 상욱씨와의 함께 가야금산조를 연주하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당시의 감동이 생생하다는 그다.
"참 행복했죠. 가야금 연주하면서 동반자를 만났고, 또 아들딸도 음악계 길을 함께 걷고 있어서 뿌듯했습니다. 가야금 연주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가족들의 힘이 정말 커요. 예술을 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평안과 행복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성 명인이 전남대 국악과로 전임 발령을 받은 해는 1985년이다. 결혼하고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나와 곧장 후학 양성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올해로 32년째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연주에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연주 기법은 연습을 통해 자연스레 습득 되는 것이지만, 철학을 빚어내는 것은 연주자만의 연주관이 정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베스트(Best)가 되려 하지 말고 온니(Only)가 되라’는 말이다.
"제자들에게 늘 말해요. ‘우리는 기술자가 아니고 예술 하는 사람이다’ 라고요. 스승의 연주기법을 흉내 내면 기술이 되지만, 거기다 자기의 생각을 얹어내면 예술이 되거든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좋아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주에 진정성이 없죠. 자신의 연주를 자기가 좋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듣겠습니까?"
그가 말하는 철학은 바로 ‘감정’이다. 연주가 무르익을 때면 그야말로 연주자 본인이 울컥하는 뭔가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가르쳐줄 수 없는 ‘공력’이 그것이다.
그래서 성 교수는 연주 할 때 ‘한 편의 소설을 쓴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가사는 없지만 ‘스토리’는 있는, 솔직한 마음의 대화를 펼친다. 그의 연주에 담은 스토리는 매해 정기연주회로 관객들에게 선보여져 왔다. 지난해까지 42회를 올렸고, 오는 9월과 11월 연주회가 벌써 예정됐다.
독주회를 계속하는 이유를 묻자 "발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1년 전 연주와 10년 연주의 깊이가 모두 다르듯 매년 변화하는 자신의 연주를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의무라고 믿는다.
"독주회는 1시간여 동안 어떻게든 혼자 이끌어 가야 하는 공연입니다. 30년 넘게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저는 제가 가야금 연주자란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교육자와 연주자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죠. 연주를 통한 실질적인 현장경험이 있어야만,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더 전할 수 있죠."
반백년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철저하게 지켜 온 그의 원칙은 ‘꾸준한 연습’이다. 그래야만 손이 굳지 않고, ‘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금도 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야금을 연주한다.
"국악 한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나무를 키우는 일과 같아요. 작은 나무를 심어 ‘거목’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늘 적당한 양의 물과 햇빛 그리고 영양분이 필요하죠. 가야금 연주도 마찬가지에요. 늘 꾸준히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대해야해요. 국악기를 자신 삶의 동반자라고 생각해야하죠."
50년 삶과 동행해 온 가야금과 나아가야 할 길도 멀다. 한국적인 가야금 선율을 고스란히 잇는 일이 그것이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가장 한국적인 음악’에 다가서기 위한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시대를 뚫고 온 전통은 그 존재 자체로 강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 수 있는 설득력이 있죠. 이를 잘 이어가는 것, 미래 세대들에게 잘 전하는 것이 제 역할이겠죠. 늘 처음처럼 묵묵히, 열심히 걷겠습니다."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박세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