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연출’에 꿈을 키웠던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이 광주로 돌아왔다.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해 연극영화학을 전공했고, 부족한 공부를 채우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가, 러시아 국립예술원 예술학 박사 학위도 따냈다. 한국에 와서는 ‘스타니스랍스’ 연기 대학을 세워 연극인들에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연기 교육의 장을 깔았다.
그런 그가 다시 광주로 왔다. 지난 4월 광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나상만씨 이야기다.

33년만의 ‘귀향’이라 소개한 그는, "이제부터 할일이 정말 많다"며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사실 그의 고향은 무안이지만, 광주는 나씨의 빛나는 청춘시절을 함께한 제2의 고향과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우선 과제는 광주시립극단의 정상화다. 시립극단은 재 창단 24년 만에 전임 감독의 자금 운용상 부적절성이 드러나면서 파행을 맞았다. 지역 연극인들이 반발했고, 시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극단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1년 가까이 시립극단은 공연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 차기 예술감독에 대한 염려 그리고 기대가 높은 이유다.

나 예술감독은 이 같은 ‘위험’을 새 출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극단 정상화를 위한 제1과제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 발굴을 꼽았다.

그는 ‘광주형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광주시립만의 확실한 색깔을 찾는데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킬러콘텐츠의 성공의 키는 광주를 담은 ‘소재’가 아니라 공연콘텐츠의 탄탄한 스토리·연출력에 있다고 단언한다.

"공연콘텐츠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합니다. 첫 무대로 선보일 작품은 러시아 슈우킨 연극대학 창설 100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린 ‘멍키열전’으로 정했습니다. 전 세계 문학작품 속 ‘원숭이’ 주인공들을 뽑아 제가 직접 쓰고 연출한 극이죠. 큰 주제는 원숭이를 통해 인간의 꿈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9월 첫 공연 이후, 광주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키워 상설공연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그는 잘 만들어진 ‘멍키열전’이 광주시립극단의 명예 회복에 기여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 보였다. 극단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보이는 것이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라 믿는 그다. 특히 그는 이를 전국은 물론 해외순회공연으로 이어갈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나 감독은 공연의 성공적인 상품화를 위해서는 상설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고정 레퍼토리가 없이 ‘새 작품’을 올리는데 만 몰두하다 보면, ‘무’(無)가 돼버리는 가치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무대장치·소품의상 등 막대한 예산을 들여놓고, 일회성 공연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객들의 오랜 사랑을 받을만한 레퍼토리 작품이 없기 때문이죠. 배우들의 경우도 몇 달간 연습을 하고, 단 며칠에 끝나는 공연의 반복 속에서 땀과 투자의 비효율성이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키는, 바로 상설 정기공연에 있습니다."

이와 함께 공을 들이는 것이 바로 연극인들을 위한 체계적 연기훈련이다. 그는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정착시켜 지역 연극인들의 재교육에 나설 작정이다. ‘스타니스랍스키’란 세계적인 연출가이자 배우, 연극이론가인 스타니스랍스키가 제시한 체계화된 연극 이론을 말한다. 풀어 설명하자면 ‘도제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연극의 공통원리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광주 뿐 아니라 한국의 연극 교육은 대부분 체계 없이 도제식으로 전승돼 왔습니다. 선배들이 하던 모습, 대사의 톤 등을 답습해 온 것이죠. 특히 배우들이 감정을 풀어내는데 있어서 심리에 매몰돼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움직임이 거의 없이 대사에 몰두하는 것이죠. 이 같은 관습 아닌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 단원들의 연기훈련과 신체훈련을 체계화해 예술적 기량을 향상시키는 제도를 만들 계획입니다."

신인 배우들은 차치하더라도 중견 배우들의 재교육에 어려움은 없을까 묻자, "오히려 연극인들이 원하는 교육"이라 전한다.

"지역 연극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길 듣는 작업 중입니다. 지역 연극계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부족함을 알아가고 있죠. 체계적인 연기훈련과 재교육은 지역 연극인들이 요구하는 사항입니다. 연극인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해가면서 광주에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 정착에 힘을 쏟을 작정입니다."

극단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예술감독제 정착과 정립’, ‘상임단원제 채택’ 등을 꺼내들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광주시립극단은 객원연출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연기자들과의 소통은 물론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죠. 이름뿐인 예술감독제가 아니라, 내실화를 꾀할 때입니다. 극단이 정착하기 전까지는 객원연출은 배제해야겠지만, 차차 국내외 유능한 연출가들에게 문호를 개방, 작품의 다양성과 예술적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일 예정입니다."

상임단원제 채택은, 눈길을 끈다. 광주시가 운영 중인 8개 시립예술단 중 극단과 오페라단은 공연 시에 출연자들을 꼽는 비상임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공립극단 중 연기자 상임단원제도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 곳은 국립극단과 광주시립극단 뿐이다. 예산상 운영의 효율성을 찾고자 함이다. 그러나 나 예술감독은 연기자가 없는 극단은 엄격한 의미에서 예술단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작품에 따라 연기자를 선발하는 제도로는 극단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자 상임단원제를 위해서는 극단의 신뢰회복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으로 지역사회에 든든한 신뢰를 쌓는다면, 임기 내 실현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처음부터 큰 욕심을 내어 정원을 많이 늘려달라는 무리한 요구보다, 자생력을 기르는 데 집중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시립극단의 공연 계획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 관광객들이 좋아할 킬러콘텐츠 등 다양한 장르를 구상중이라 한다.

"멍키열전을 성공적으로 제작, 상시공연으로 정착시키는 게 첫 발이겠죠. 겨울에는 제 작품 ‘우덜은 하난 기라’를 이 시대에 맞게 개작한 ‘달빛 행진곡’을 올리고 싶어요. 내년에는 DJ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 ‘김대중’을 문화전당 혹은 대형 기획사와 공동으로 제작했으면 합니다."

여기다 지금껏 광주시립극단이 쌓아온 인기콘텐츠도 십분 활용한다. 여름이면 야외무대에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브랜드 수시공연 ‘전우치’가 시일 내 다시 찾아온다. 또 이전 작품 중 베스트 공연을 꼽아 새롭게 연출한 무대도 꾸민다.

"연극은 만남이고 인간에 대한 탐구입니다. 광주시립극단에서 인간의 고귀한 영혼이 예술적 형식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땀 흘리는 배우들을 돕고 싶고, 그런 배우들과 창작의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연출 작업은 ‘인간경영’이라 믿어요. 단원들의 지휘, 감독을 넘어 그들이 동반자로, 작품의 공동 창조자로서 함께 걷고 싶습니다."

나상만 광주시립극단 예술감독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와 동대학원 석사, 러시아 국립예술원 예술학 박사, 광주시립극단 상임단원, 슈우킨 연극대 교수, 숭실대 주임교수, 경기대 연기학과 부교수, 스타니스랍스키 연기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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