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밤의 솜털에 성냥불을 붙인 사람들의 아침
조용히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은
날개를 접고 주위를 주시한다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새들도 습관적으로 줄을 지어 날아간다
높이가 다른 냉담한 건물들과 함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의 한 구석에서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거리는 일
어디인가 무엇인가 아파도 많이 아파도
죽지 않는 영혼의 일 지루한 꿈의 일
그러니까 결국 새의 입장도
밤의 통증처럼 멀리 사라져 가는
행인의 뒷모습과 같다
사랑을 취소하고 사랑을 꿈꾸는
새의 소리에는 인과가 없다
나를 생각하면 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낡은 체제에 매달리는 동안
불쑥불쑥 밀고 들어오는 꿈도
폭력이라는 것을 새는 알지 못한다
종일 숲에 매달리다 겨울이 간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간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쉽게
네가 지나갈 줄 알았기 때문에
내일도 끝까지 허공에 취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저녁, 새에 편입되어 읽던 책을 덮는다

위 작품은 제8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한 시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로, 전남 장흥 출생 이재연 시인의 작품이다. 그는 오랫동안 일기 쓰듯 침잠한 내면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작품화한다. ‘시산맥작품상’ 심사평에 그의 시적 행간이 잘 드러나 보인다. 당시 심사평에는 서정을 기조로 안정되게 흐르는 리드미컬한 문체가 가히 일품이라면서 일체의 고리타분한 비유를 배제하고 시종 일관 주제 하나로 공중을 건너는 새의 일상을 인간사에 편입, 안정된 알레고리를 차분히 확보한 것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의 시들은 이처럼 깊은 사유와 고뇌 속에서 행간을 메꾼다. 이런 그를 지난 8월17일 오후 광주시 서구 풍암동의 한 커피숍에 만나 시인으로서의 삶을 들어봤다. 그는 인터뷰하는 내내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시(詩)를 펼쳐보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도 늦깎이 시인이다. 마흔 둘에 시 ‘돌에 물을 준다’로 신춘문예에 당선, 시단에 이름을 올리는 한편, 충북 보은 출생 오장환 시인(1918~1953)의 삶과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북 보은군이 후원하고 실천문학사에서 주관해 운영중인 ‘오장환 신인문학상’에 제1회 수상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이때가 2012년이었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 내민 그의 시적 결기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 시적 내공이랄까. 그는 젊은 날 자신도 모르게 시적 홍역을 앓아왔던 듯하다. 문학소녀니, 문학청년이니 하는 패턴으로 보더라도 그는 지극히 문학 열병을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여내며 온 것 같았다. 오는 동안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사유로 받아들이거나 일상 속 정리를 기록으로 해왔다는 설명이다. 그는 ‘쪽지’라고 설명했지만 시적 메모로 이해됐다. 고향인 장흥 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줄곧 책에 빠져 보냈다. 어떤 목표가 구체적으로 있었다기보다는 막연히 책이 좋아 책을 가까이 했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밑에 시리즈물이나 문고 등을 숨겨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전에 빠져 들었다.

“뭘 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뚜렷한 꿈은 없었죠. 막연하게 뭔가 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을 했어요. 고교시절 작문 시간에 선생이 저보고 ‘어디서 보고 베꼈냐’고 할 정도로 소질이나 문학적인 끼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고 때 ‘절대고독’에 관한 문제 등을 적은 쪽지를 많이 주고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는 시를 알고 메모를 했던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쪽지 습관은 훗날 사회생활을 할 당시 대학노트로 옮겨 계속된다. 시라는 생각보다는 일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이뤄진 메모였다. 그는 시에 관한 지식이 별도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를테면 경기도 장흥 카페촌을 다녀와서 시를 썼는데 이 시를 부친이 시조시인인 친구에게 보내줬더니 그 친구가 시를 쓰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시적 깊이는 점차 골격을 갖춰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그는 드라마 작가를 꿈꿨다. 1980년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드라마 작가를 양성하는 곳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1991년 출간된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도 탐독했다. 나중에 적성에 맞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그만뒀지만 그는 이곳에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동향의 시인을 만난다. 그 시인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보여줬더니 ‘시를 써보라’는 말에 더욱 용기를 얻어 매진할 수 있
었다. 그가 서울에 머문 시기의 한 대목이다. 시와 계속 엮어져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생활했다. 그러다 1994년 결혼을 하게 됐고, 큰 아이가 돌을 지나고, 둘째 아이가 갓 태어났을 무렵인 1997년 광주로 터전을 옮겼다. 그 이후 광주에 머물며 2002년 광주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문학공부를 했다. 이전에는 연년생인 두 아이를 키우며 시를 배우러 다녔다. 광주여대와 광주대 평생교육원에서 시 강의를 들으며 시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가 늦은 나이로 대학에 진학했을 무렵인 2002년 한국시단의 시풍은 당시 문단에 나온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가늠할 수 있었다. 시가 계속 동어 반복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식상하고 지지부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술회다. 흥미나 감동, 신선함을 얻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마음에 다가오지 않은 시들이 넘쳐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2005년 신춘문예에 당선돼 더 깊이있는 작품들을 창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침체로 빠져들었다. 당시 문단은 미래파가 쏟아져 나오는 무렵이었다.

“제 머릿속은 앞서 가는데 손(필력)은 못따라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4∼5년 동안 방황을 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고 절망의 시간을 보냈죠. 누구에게 조언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저를 소진한 것 같아요. 그런 방황을 겪고 시단을 보니까 지지부진했던 시 창작을 뛰어넘어 참신한 시들을 쓰고 있더군요.”

그의 시적 방황이 끝나는 대목인 셈이다. 방황 이후 한결 깊이를 더한 시작품을 창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부산일보 시부문 최종심에 오르기도 한 것이다.

고민이 ‘시를 어떻게 쓰냐’는 것이라는 그는 시가 침체를 거듭할 때마다 다시 읽으며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시집 세권을 언급한다. 늘 시적 통로가 막힐 때마다 T.S.엘리엇의 대표작을 묶은 시선집 ‘황무지’와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는다고 한다. 그는 ‘황무지’가 모더니티를 가지고 있으면서 형이상학적 미학도, 철학적인 것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들 시집에는 꾸준하게 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독특한 감각들이 투영돼 있다는 설명을 잊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뤄보고 싶은 소재나 주제의식을 물었다. 시대와 존재의 결부라는 설명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존재는 현재적 시간, 혹은 시대와 아주 무관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일이 존재를 바라보는 일이 될 것이고, 존재를 바라보는 일이 시대를 이해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죠. 이와 함께 인간 고유의 의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 창작에 매진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바라고 있죠. 부족한 능력을 깨닫고 있는 사람으로서 고단한 여정이 되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가는 데 까지 가볼 작정으로, 좌절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게 시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광남일보 gwangnam@gwangnam.co.kr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