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떠올리면 크게 ‘꼬레라숑’(Coreelation)과 ‘판회화’가 떠오른다. 광주와 불란서 판화 교류를 주도하는 유일의 단체인 ‘꼬레라숑’의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의 2005년 프랑스 초대전 때 우연하게 전시장에 들른 프랑스 노르망디 루앙시의 판화가 파스칼 지하흐(Pascal Girard)와 인연이 닿으면서 그 출발의 싹이 틔었다. 그 이듬해인 2006년 파스칼 지하흐가 광주를 방문하게 됐고, 판을 좀 더 키워볼 의향이 없냐는 물음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가 고민 끝에 숙제를 푸는 심정으로 결성된 것이 ‘꼬레라숑’이
었던 것이다.

2007년 11월 ‘꼬레라숑’의 창립전이 프랑스 루앙시에서 샌느 마리팀(Seine-Maritime) 주에서 경비 전액을 지원해 열리면서 현재까지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르게 된다. ‘꼬레라숑’은 그가 매개가 되고, 교류활동에 팔을 걷어붙이지 않았다면 단발적 교류전으로 그쳤을 터다. 광주에서는 그를 주축으로 민간이 중심이 돼 끌고 왔어야 했기 때문에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꼬레라숑’을 끌고 온지 11년째를 맞았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5회의 전시와 광주에서 2회의 전시가 열렸다. 올해 교류전은 단체전과 연계전시로
나눠 광주에서 진행됐다. 단체전은 ACC아시아창작스튜디오 지호갤러리(7.11~25)와 무등갤러리(7.12~18)에서, 연계전시는 전남대학교 용지관과 한국미용박물관, 목담미술관에서 각각 열렸다. ‘꼬레라숑’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오랜 기간 동안 해외와의 교류가 지속되고 있는 유일한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그는 정금희 교수(전남대 미술학과)와 함께 판화와 회화를 융합해 만들어내 미술계 등록단어가 된 ‘판회화’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판회화는 오늘날 시대상을 투영한 단어이자 새로운 장르다. 현대미술이 이웃장르와 융복합되는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판화와 회화를 섞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는 판회화에 대한 설명을 한참동안 이어갔다.

“아무래도 예술가들은 새로운 기법과 영역을 창출해 내야하죠. 기존의 회화나 판화의 단조로움을 불식시킬 수 있습니다. 판화는 판이나 동판에 새기거나, 긁거나 부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개념을 회화에 도입시킨 것입니다. 판화는 회화가 갖는 장식적인 면이나 일회적인 면을 새롭게 뒤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게 장점이죠. 단점은 똑같은 회화가 안나온다는 점입니다. 희소성이 없는 대신 대량생산을 하게 되죠.”

이처럼 ‘꼬레라숑’의 결성과 ‘판회화’의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판화가 노정숙(국제시각문화예술협회 대표)씨다. 지난 8월17일 오전 그가 부관장으로 있는 한국미용박물관 사무실에서 만나 판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원래 대학 때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판화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1980년대 당시 국내 유일하게 개설돼 있던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판화과에 진학하면서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다. 군부독재 하의 현실사회에 대한 목마름이 전반적으로 판화의 관심을 고조시켰고, 부조리한 세상의 저항의식을 예술로 형상화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장르였다. 일명 ‘민중판화’의 전성기가 열렸던 것이다. 여고 2학년때 5·18을 겪었고, 1982년 전남대에 입학했지만 엄청난 데모가 매일 지속됐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그가 재학하던 미술대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맞물리면서 그는 판화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성신여대 대학원에 입학할 무렵, 전남대를 졸업했다는 것 하나로 데모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만 했다. 개인에 대한 감시도 끊임없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그래서 판화는 그에게 젊은 날 이후 줄곧 삶의 안과 밖을 지탱해온 증거나 다름없었다.

서양화와 판화 양쪽을 모두 공부해본 입장이 되다보니 이들 장르의 명암을 확실히 간파할 수 있는 것도 그에게는 큰 복일 수 있겠다는 짐작이 갔다. 판화는 회화와 달리 저널리즘적인 특질이 있는데다 공동체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으로 꼽힌다는 설명이다. 이에 반해 회화는 ‘1점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판화는 대중성과 대량성, 그리고 메시지의 저널리즘적 경향이 있다는 게 그의 풀이다.

그는 1988년 관훈미술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당시에도 시대적 억압은 계속됐다. 전시제목과 작품제목 없이 전시를 열어야만 했다. 개인화가의 전시에까지 독재권력의 서슬퍼런 감시의 칼날이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통 시대를 제재하고 있던 권력이었다. 그만큼 독재권력이낳은 폐해가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고 1990년대로 진입하면서 판화에 변화를 가할 수 있었다. 흑백 중심의 판화에 색감을 넣는 것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광주이야기를 계속 다뤄
왔다고 하더라도 숭고한 열사들의 영정 앞에서 흑백 외에는 다른 컬러풀한 색감을 쓸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러한 면도 판화가 다채로운 색감을 가져가지 못한 이유였다.

이런 그에게 판화의 의미를 묻는 것 자체가 결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판화에 대한 이야기는 쉼없이 이어졌다. 굴곡진 시대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판화였지만 시대가 바뀌고 강산이 몇 차례 바뀌면서 판화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판화의 활성화는 1990년대 저변이 엄청 컸다고 볼 수 있죠. IMF 전후 판화의 외연이 붕괴됐다고 생각합니다. 투자 가치를 따지기 시작하면서가 아닐까 싶어요. 그동안 판화의 부흥 노력을 많이 펼쳐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판화는 시장에서 저평가되고 있어요. 드로잉을 해서 판으로 옮기고, 찍어야 하는 등 세차례의 작업을 복잡하게 거쳐야 완성되니까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죠. 그럼에도 저렴하게 거래되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할 수 밖에 없어요. 미술장 르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회화가 300만원에 거래된다면 판화는 30만원에 거래되는 형국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판화의 열악한 현주소를 이야기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IMF를 거치지 않은 유럽은 판화의 대중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념이 될만한 날 특별하게 주고 받는 선물처럼 자리잡고 있다는 전언이다. 유럽은 드로잉 작품을 소장할 때 판화로 소장하는 흐름까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판회화 작품인 ‘공백의 그림자’ 작업을 벌이고 있는 그는판화가 예전만 못하지만 판화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할 생각이다. 이런 그에게 어떤 작업을 앞으로 해볼 계획이냐고 묻자 기법적인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작가 정신과의 실제 작업에 임하는 태도 등 합일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비움에 대한 작업을 할 거예요. 털어버리는 것이 비움인데 이 비움을 얻기 위해 ‘공백의 그림자’들을 드러낼 작정입니다. 어찌보면 비운다는 것도 치열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비울 수 있는 것이겠죠. 제게 비움의 대상은 아마 1980년대에 대한 트라우마와 삶의 갈등,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라고 생각해요. 굴곡진 기억이나 비었지만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꺼내 보면서 정신적 치유를 위해 당분간 비움의 작업을 지속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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