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여자 아이가 한 국악원 앞을 서성였다. 그 안에서의 광경이 그의 발목을 꽉 붙잡았던 탓이다. 문너머 무용수들은 반짝 반짝 빛이 났다. 흘러나오는 장단에 맞춰 손을 들었다가 훅 떨구기도 하고, 잔가락에는 재게 발을 놀렸다. 무언지는 몰랐지만 그도 스텝을 요리 조리 따라해 보았다. 소리와 가락 그리고 몸놀림이 어우러지는 한국 무용이 그의 마음을 홀딱 빼앗은 사건이다.

한국무용가 서영(송원대 실용예술학과 교수)과 무용의 첫 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지난 8월16일 송원대로 서영 교수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연습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군무 대열을 가다듬을 땐 매서웠고, 무용수들 몸짓의 섬세함을 요구할 땐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국악원 앞에서 오도카니 서 있던 10살 소녀가, 한국무용가로 또 제자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난 것이다.

“어떤 한계에 부딪힐 때 마다 처음 한국무용을 접했을 때 그날을 되뇌었어요. 심금을 울리던 가락과 몸짓을 곱씹으면서 춤을 췄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작품을 올렸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살아있음이 느껴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여전히 춤출 수 있다는 것이고, 무대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는 누구보다 한국무용을 사랑한다. 그의 인생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3학년 때 처음 접해 취미로 배우다가, 5학년 때 본격적으로 무용의 길을 걸었다. 자신의 의지도 확고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담임선생님의 공이 컸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제가 학교 무용연습실로 가서 선배들이 연습하는 것을 그렇게 쳐다봤대요. 춤추는 언니들이 부러웠던 모양이에요. 부모님은 무용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선생님이 적극 권유하셨어요. 학원비나 무용복 등 비용을 다 본인이 부담하겠다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부모님이 지셨죠.”

그가 춤 공부를 할 때만 해도, 한국무용은 참 열악했다.광주에 선생님이 없어서 서울에서 초청해 교육할 정도였다. 서영 교수는 학원에서 한국무용은 물론 발레·현대무용도 함께 배웠다.

이때부터 ‘춤꾼’ 서영의 인생이 펼쳐졌다. 그는 출전한 대회에서 늘 주목을 받았고, 화려한 수상 경력이 하나, 둘 늘어갔다. 이 덕분에 춤을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서광여중에 무용특기자로 입학했고, 이후 광주예고에 진학해 춤 공부를 이었다. 예고에서 그는 가야금·피리 등 국악기 연주법도 익혔다. 춤을 출 때 가락을 누구보다 빨리 익히는 것 또한 당시에 배워둔 국악기 덕이다. 그가 지금껏 선보인 ‘작침’, ‘아리’ 등 작품들에 나타난 창작의 힘은 이때 길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서영 교수는 스물다섯 살,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건 무용학원을 운영했다. 여느 춤꾼들과는 조금 다른 행보다.

그는 조선대 무용과 졸업 후 1992년 광주시립무용단(현발레단)에 입단해 활동했는데, 3년 여 만에 그만두었다. 시립무용단이 ‘발레’로 정체성을 잡아가면서 한국무용의 입지가 좁아졌던 탓이다. ‘내 길은 내가 찾아야겠다’며 나와서 차린 것이 바로 학원이었다. 대학 1학년 새내기 때부터 입시 지도를 도맡았다 하니, 가르침의 기술은 타고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가 가장 공들이는 부분은 인성이다. 반듯한 인성이 깔려 있어야만 춤 선이 올곧고 아름답다 한다.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더 그 생각이 확고해져요. 춤은 누구나 잘 출 수 있는데,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가짐이거든요. 타인의 마음에 공감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은 춤에 있어서도 몰입력이 뛰어나요. 조금만 그 감정 선을 건드려주면 오롯이 춤에 실어내죠.”

2002년에는 애제자들과 함께 ‘서영무용단’을 창단했다. 서영무용단은 한국무용이 ‘재미없다’는 편견들을 깨는 데 탁월한 팀이었다. 한국무용 특유의 예스러운 몸짓들은 그대로 이어가면서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 방법, 무대 연출이 신선해서다. 이 같은 그의 타고난 기획력은 2013년 전국무용제 대통령상 수상작 ‘작침’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까치들이 집을 짓기 위해 돌멩이를 물어 나르는 것을,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찾는 여정으로 그려냈다. ‘신목’이란 작품에서는 평화의 염원을 먹고 자란 천년된 나무가 ‘청년의 학’이 되는 과정을 움직임으로 담아내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무대를 보면서 궁금증만이 남는 것은 좋은 작품은 아니란 생각이에요. 안무가가, 또 무용수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지점들이 필요하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용수들의 하나 된 ‘에너지’입니다. 한 명 한 명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발산될 때 관객들은 감동을 느낍니다. 한 몸 한 뜻이 돼야만 감정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지요.”

제자들을 길러내는 지도자로서, 그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깊다. 좋아하는 춤을 추면서 살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는 것이 자신의 몫이기 때문. 그는 전통무용, 창작, 타악 등 다채로운 장르의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 왔다. 좋은 트레이너들을 초청, 특별 레슨을 받기도 했다. 흔히 세련미가 떨어진다는 ‘지방색’을 지우기 위함이다.

“춤에 있어서 갇혀 있지 않으려 노력해요. 국공립단체이든, 좋은 대학이든 그들이 원하는 지점들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계속해서 공부해가면서 일종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죠. 전통춤이라 하더라도 현대적인 센스나 감각이 무뎌지면 안 되거든요.”

이 같은 스승을 둔 덕에 그의 제자들은 국립무용단을 비롯해 경기·서울·울산시립무용단, 전남도립국악단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서영 교수는 안무가, 단장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가 ‘한국무용가’란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끊임없이 춤추게 하는 ‘힘’을 길러준 것은 바로 그의 스승 인간문화재 정재만 선생이다.

“제가 서울에서 공연을 하는데 정 선생님이 보시곤, ‘왜 서울로 대학을 오지 않았느냐’ 하시는 겁니다. 그 길로 선생님 제자가 돼 각종 춤을 전수받았습니다. 20여년 일주일에 한 번씩 광주-서울을 오가면서 춤 공부를 했어요. 정재만 선생님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인생의 스승님이시죠. ‘심금’을 울린다는 것,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을 제 스스로 느끼면서 춤추게 해주신 분이니까요.”

전통의 울림을 깨달은 그의 춤엔 깊이가 더해졌다. 그의 스승은 “서영 춤엔 깊은 맛이 있다”고 늘 말해줬다. 서영 교수는 이를 남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자산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춤을 추더라도 위쪽 지방의 춤과 남도의 춤은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남도의 맛을 살린 ‘육자배기 춤’을 선보이고 싶은 꿈이 있다. 한국전통춤이 있지만, 서영만의 색을 담은 춤을 춰보고 싶은 욕심이다.

“지금껏 열심히 춤을 췄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춤 색은 없는 것 같아요. 승무·살풀이·태평무 등 다양한 춤을 섭렵했지만 이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잖아요. 남도의 대표민요 ‘육자배기’를 활용한 새로운 남도 춤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육자배기 장단은 변화도 다채롭고 동시에 감정의 깊이도 있죠. 남도의 한과 남도 사람들의 정서가 듬뿍 배어있는 가락에 몸을 맡겨보고 싶어요. 나중에 육자배기춤 하면 ‘서영’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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