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을 만나보면 두 가지 공통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대체적으로 많았던 게 가정형편과 자녀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가정형편이 어려워 미술입문이 늦었다거나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고, 자녀는 반드시 1명 정도가 미술에 입문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화가 역시 이 두 가지 범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부친이 일찍 별세해 가세가 기울어 어려웠으며, 1남1녀의 자녀 중 딸이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아버지처럼 화가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미술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그 분야에 투신해 현재는 상경, 영화 무대미술팀에서 일하고 있다 한다. 이 사연의 주인공은 올해 화단 생활 40년째 돌입한 서양화가 류재웅씨. 류 작가는 보통 화단의 단체전 같은 데에서 간혹 볼 수 있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단체전이 ‘영암 월출미술인회’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광주 출생이지만 유년 시절 영암에서 잠시 보내게 된다. 영암은 자신의 본적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월출미술인회에 정성을 다하는 듯하다. 광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줄곧 머물렀던 곳이기에 영암 못지 않게 각별하다. 그래서 그는 월출산도, 무등산도 자신의 산이라고 자신있게 밝힌다. 이런 그를 영암 월출미술인회 회원전(9.20∼10,2)이 열리던 유스퀘어 금호갤러리에서 만나 그간의 삶과 회화에 대해 들어봤다.
이 회원전에 그는 대작 중 대작을 출품했다. 가로 8m9㎝×세로 1m24㎝ 크기의 ‘월출산과 영산강’이 그것이다. 워낙 규모가 있다보니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작품은 바람재에서 본 풍경으로 왼쪽에는 구정봉이, 오른쪽에는 천황봉이 자리하고 있다. 무등산까지 표현돼 있다. 애초 작가는 ‘나의 고향 나의 산’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
그가 2000년 초반 설경을 많이 작업했는데 진경에 탐닉하던 무렵이었다. 대학원 논문도 진경사상을 테마로 해 작성했는데 ‘진경-그 리얼리즘에 대하여’였다.
여기서 리얼리즘은 정신적 사실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면 쉽게 이해할 듯 싶었다.
진경을 위한 15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강원도 오지를 찾아다녔다. 남도를 그리기 위해 섬도 누볐다. 월출산 바위를 표현하면서는 소나무나 풀도 놓치지 않고, 깊이있게 관망하면서 연기를 품은 바위라는 느낌을 담아 내는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올들어서 월출산을 두 차례나 올랐다. 보통 작가들이 대작하기 어려운데도 그가 대작을 할 수 있었던데는 환경적인 것과 재능적인 것이 컸다.
자신이 대작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강원도를 답사하면서 생긴 화관(畵觀) 때문으로 보인다. 대작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된 셈이다.
그는 1000호와 500호 등 사실적인 그림 30∼40점을 40대 전후로 했을 만큼 그림에 대한 몰입이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회원전에도 그런 전력으로 인해 다른 화가들이 어려워하는 대작을 쉽게 작업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요즘 그는 ‘설산’ 설경 작업을 한다. 진경적인 눈 풍경 등 작업을 전개하다 최근에는 산수유 작업을 한다. 이런 그는 어떻게 미술입문을 했을까 궁금해 물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어요. 미술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인 14살 무렵이었죠. 처음 시작할 때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죠. 광주 숭의중학교에 입학해 미술부 소속으로 선배들에게 그림을 배우게 됐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호남예술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입상에 들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보면 될 거예요. 미술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니까 부모님께서 ‘미술연감’이라는 책도 사주더군요. 이 일로 인해 부모님의 미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후 화실에 다니며 더 깊이있게 그림공부에 집중했지요."
그런 과정 속 미술인으로서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스승과 도반을 언급했다. 스승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만난 ‘강원탄광촌 화가’로 유명한 황재형씨이고, 도반은 절친으로 지낸 최인선 홍익대 교수를 꼽았다. 그에게는 소중한 미술적 자산인 셈이다. 이들은 그에게 지금까지도 큰 나무같은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대개 1980년대 전후 그랬듯 그림으로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였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 다니는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을 위해 10여년 미술학원을 운영해야 했다. 1995년 무렵 작업을 위해 학원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96년부터 본격 작업에 들어간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처럼 그에게 작업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과 무등미술대전 대상, 전남도전 우수상 등 스승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각고의 개인적 노력으로 각종 미술대전에서 입상한다. 그는 허투루 작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요즘 어떤 작업을 벌이고 있을까 궁금해 물었더니 산수유 작업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요즘 산수유를 그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한점씩은 가지고 있을만한 게 산수유라고 보면 됩니다. 저도 그런 산수유 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나온 유화 물감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제 감수성 등을 투영해 다양한 느낌의 산수유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게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죠."
그러면서 그는 ‘유명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40대까지 계속됐다고 덧붙였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유명한 작가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자신도 그러했다고 술회한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던 이유 역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유명작가에 대한 로망이 40대까지 계속됐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다른 생각이다. 유명한 화가보다는 그림을 그림 자체로 좋아하는 화가로 남고 싶어한다. 그래서 되도록 편안하게 작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20년째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조선대 평생교육원에 성실하게 임하면서 작업 역시 꾸준하게 진행해나갈 복안이다.
"제 나름대로 현대미술은 자기 개성을 살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성적인 작품을 끝까지 하고 싶은 것이죠. 미술에서도 구상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제가 몇년을 더 작업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치밀하게 무등산과 월출산 작업을 할 겁니다. 이런 작업들이 모두 비유와 연관돼 있어요. 거기서 영감을 얻은 작업을 지속하고 싶습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