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호·제70호=이성오 기자) "양 상무님! 삼성에서 별을 달았는데, 이제 다음은 무엇입니까?"
2016년 1월, 처음으로 만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는 삼성전자 양향자 상무에게 이렇게 물었다. 즉각 답을 못했다. 순간 수많은 상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아침편지’로 유명한 작가 고도원의 저서 ‘꿈 너머 꿈’이 생각났다.
고도원 선생도 ‘깊은산속옹달샘’에서 교육 중이던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꿈을 꾼다. 하지만 꿈이 이뤄졌다고 인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꿈을 이룬 다음에도 새 꿈을 가졌을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훌륭하고 행복해진다. 꿈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생이지만 꿈이 계속 진화한다면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한다.
그는 문 대표를 만나고 민주당 입당을 결심했다. 2016년 1월11일 월요일 회사에 결심을 알렸다. 입당 기자회견 일정은 다음날인 12일로 잡혔다. 밤에 입당사를 쓰기 시작했다. 겨우 한 줄을 썼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눈물 속으로 지나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는 1967년 화순 이양 벽촌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고명딸인 그는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 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가족 몰래 저녁에 광산에 가서 일하기도 했다. 어릴 적 꿈은 대학교수였지만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상고를 택했다.
삼성전자에 처음 입사한 것은 막 광주여상을 졸업한 19살 때였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연구보조원이었다. 복사하고, 커피 타고, 반도체 도면을 받아오거나 반도체 설계도면을 지시대로 그려내는 게 전부였다.
그가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 것은 파란 눈의 외국인 여성을 만나고부터였다.
인텔 출신으로 삼성 미국 법인에서 일하는 연구원인 ‘비바’는 어느 날 본사 초청으로 기흥에 와 기술이전을 위해 2주 동안 머물렀다. 비바는 날마다 컴퓨터실에 앉아서 고위 간부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반도체 설계도면을 레이아웃 했다.
그도 같은 일을 했지만 ‘아무나 배우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핀잔을 들어온 일이었다.
그런데 비바는 숙련된 오퍼레이터로서 복잡한 도면의 모든 공정을 단숨에 척척 완성해냈고, 회사의 모든 사람이 비바의 업무를 배우고자 했다.
"향자가 하는 일은 우리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미국에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일이라 나이 40, 50이 넘어도 할 수 있어요."
스무 살이나 많았던 비바는 그에게 꿈을 심어줬고, 연구원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했다.
"당시만 해도 상고 나온 여자가 과장, 부장이 되는 것은 먼 나라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고,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죠."
하지만 그가 반도체를 설계하는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고졸 그것도 상고 출신, 여자 사무보조원이 최첨단 산업의 기술자가되려면 배워야 할 것, 넘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꿈을 이루는 매개체는 ‘일어’였다. 당시 반도체산업은 일본이 앞서갔기에 연구원들은 일본의 신기술을 담은 서적이나 잡지, 신문을 반드시 읽어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배운 일어로 연구원들에게 그저 복사해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역해서 해석을 달아주었다.
‘고졸 사무보조원은 안된다’는 교육담당부서의 수차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내 일어 강의를 이수하고 가장 먼저 일어 자격증도 땄다.
사무보조원은 사실 직원도, 사람도 아니었다. 개인 책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은 초등학생이 발로도 할 수 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함께 상고를 나와 회사에 입사했던 동료들 대다수가 한계에 직면했고,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는 일어 번역을 시작하면서 간이 책상을 얻었고, 겨우 회의실에 들어가 뒷좌석에 앉게 됐다. 연구원들의 회의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기에 배움에 대한 욕구는 더 커졌다.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무리 해도 알 길이 없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나. 보다 못한 연구원들이 돌아가며 그에게 반도체와 전자공학의 기초를 가르쳐줬다.
그는 1989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개설한 사내 대학에 문을 두드렸다. 첫 번째는 여자라는 이유로 지원 서류를 반려했고, 두 번째는 문과 여상 출신이 공학 공부를 어떻게 할 거냐며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세 번째 원서를 냈다.
"전례가 없다면 제가 이번에 시작해 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선례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가까스로 사내대학에 입학했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공부한 끝에 졸업장을 얻었다. 반도체연구실 선임연구원이 됐다. 최첨단 반도체산업의 엔지니어가 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전 대표와 함께 군부대를 방문한 양향자 원장

그는 날개 달린 듯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NVM, SRAM은 물론이고 DRAM과 플래시메모리 혁신 작업까지…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금도 그때 원천 기술 개발로 낸 특허가 40건 넘게 남아있을 정도다. ‘겁없는 아이’, ‘일벌레’, ‘혁신가’, ‘파이터’라는 별명은 덤이었다.
그는 사내에서 ‘E3’라는 연구개발직 대졸사원 자격을 얻을 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E3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도 보고 프로젝트도 수행했는데, 면접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세 번째 면접장에 들어서서 그는 평가위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면접을 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하러 왔습니다. 그 얘기만 전하고 나가겠습니다."
그는 아이를 낳으며 두 달 동안 일을 못한 것은 맞지만, 자격 테스트에서 떨어질 만큼 실력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회사는 제가 버리겠습니다." 그리곤 면접장을 나와 버렸다.
후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가장 먼저 인사팀장이 그를 불러 ‘이제 됐느냐?’고 물었다.
그토록 당돌하게 처신한 배경을 물으니 "불합리한 처사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울러 삼성이라는 조직은 상식이 통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입사 후 연구개발직 사원이 돼 고졸 E1, 전문대졸 E2, 대졸 E3 자격을 얻기까지는 각각 4년씩 통상 12년이 걸린다. 하지만 그는 늘 그 기간들을 단축해 달성했다. 꿈을 향해 거침없이 달린 것이다.
책임연구원이 되면서부터는 의사결정은 물론이고 후배 연구원들을 독려하고 고충을 상담하는 역할까지 했고,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수석연구원 6년차에 상무로 승진했다.
‘고호녀(고졸·호남출신·여자)’라는 유리천장을 뚫고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임원이 된 것이다.
그는 만 18세에 들어왔으니 입사 60주년은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항해하던 그에게 문 대표가 입당 제안을 한 것이다.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했는지 모른다. 3주 넘게 입맛을 잃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입당사를 쓰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기에 회견장에서는 더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고, 마치 국민 앞에 신상품이 된 나를 고백하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지난해 8월 그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에 임명됐다.
유리천장을 깨며 신화를 써온 사람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반도체산업기술기술자로서 모두가 공인하는 테크노크라트다. 민주당 전국여성위원장 선거에 나서 당당히 현역 국회의원을 누르고 당선돼 최고위원으로서 당을 이끈 유명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미래의 국가 동량들을 어떻게 양산해 공직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킬지 기대가 크다.
그는 역대 공무원인재개발원장과 달리 직접 강의에도 나선다. 기업에 있을 때도 직원들의 멘토로서는 물론, 일반인들의 멘토로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제 강의로 영감을 주고 싶습니다. 듣는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인사이트(insight ; 통찰력)를 얻는다면 저는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강의는 꽤 인기가 있다. 강연이 끝나면 감사의 메일을 보내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그가 걸어온 어렵고도 힘든 삶의 여정과, 쌓아 올린 인간 승리의 궤적에 공감하거나 감흥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공직사회 혁신에도 힘쓰고 있다. ‘퍼스트 펭귄상’을 도입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 도전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제도다. 이는 경직된 조직 문화로는 혁신을 끌어 낼 수 없다는 양 원장의 소신과 맞닿아 있다.
공무원이 일을 잘하려 도전하다가 비록 실패해도, 나를 온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삶을 담보하는 공직은 다른 곳보다 더 안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4차산업 대응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산업의 변화 속도에 비해 정책적 대응이 너무 뒤떨어지고 있어서다. 더구나 산업과 정책의 미스매치(mismatch)를 바로잡아야 하는 공직사회는 의사결정이 더디고 실행력이 떨어진다.
4차 산업사회에는 축적된 기술을 가진 전문가와 기술 패권을 가진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이들이 전문영역끼리 기술 패권 기업끼리 융합을 일궈낸다.
공직과 정치권에는 특화된 기술을 갖춘 전문가집단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공직의 경우 여러 보직을 순환시키고 그렇게 순환 보직을 거친 사람이 승진한다. 전문 영역을 가진 사람보다는 여러 영역을 겉핥기로 아는 사람이 승진하는 구조다. 이래서는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그의 좌우명은 유지사성(有志事成 ; 뜻이 있으면 일이 이루어진다)이다. 늘 뜻을 세우고 성취하는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취미를 물으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한다. 요즘 그의 목표는 법체계에 대한 공부다. 사회적 약자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하면서 더 간절해졌다.
그는 문 대통령 공약사업인 ‘전장클러스터’가 광주에 유치되기를 고대한다. 빛그린국가산단에 전장부품산업단지(친환경자동차부품클러스터)를 조성하는 사업은 현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 사업이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지금이라도 추켜들어 광주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코 쉬지 않는다. 과연 그의 도전의 끝은 어디인지, 그 끝에서 만나는 ‘꿈 너머 꿈’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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