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제73호=박세라 객원 기자)1980년대. 충장로에서 라이브 공연을 마친 한 청년 뮤지션이 길을 걷는다. 커다란 기타를 메고선 집이 있는 주월동까지 걷고 또 걷는다. 버스비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걷는 길이건만, 마음만은 즐겁다. 라이브 무대에서의 그 뜨거움이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어서다. 좋으니까 할 수 있었던 일, 가난하고 그래서 배고팠던 그 길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멘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었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세상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시노래 가수 기현수씨는 그 시절을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았던 때"로 회상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흰머리가 듬성 듬성한 중년의 가수가 됐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여전히 그에게 ‘노래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지난 5월7일 양림동 한 카페에서 기현수씨를 만났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에게선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쏟아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짧지 않은 그의 노래인생이 흘러나왔다.
"제 나이 열여덟 살에 동네에 있는 기타교습소를 찾아갔어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노래듣는 것, 부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늘 귀로 듣던 것을 직접 연주해보니 너무나 재미있는 거예요. 제가 부르는 ‘음’과 기타의 코드가 일치하면서 그만의 하모니가 만들어지는데 황홀하더군요. 매주 토요일에는 광주의 통기타 가수들이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음악을 녹음해서 듣고, 따라 불렀어요. 밥 먹고 잠 자는 시간 외에는 기타치고 노래만 했던 것 같습니다. 참말로 좋았어요."
그의 본격적인 데뷔는 1984년도에 출전했던 ‘MBC 대학가요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당시 ‘마지막 잎새’를 불러 동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실력을 알아 챈 ‘꼬두메’ 소속 선배 뮤지션들이 그에게 합류를 제안했다. 그로부터 10여년 세월 꼬두메에서 활동하면서 지역 포크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다.
"고향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게 큰 행운이었죠. 늘 감사해하면서 음악을 해왔습니다. 제가 음악으로 행복을 느낀 만큼 꼭 되돌려 주려고 노력해왔죠. 그것의 하나가 2016년 한종면, 이미랑씨와 함께 결성한 ‘오번줄밴드’ 활동입니다. 우리는 요양원, 병원 등 치유가 필요한 곳에서 무대를 펼쳤어요. 그 세월이 벌써 10여년이 넘었죠. ‘음악을 통한 봉사’는 지금까지도 제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하고 있는 음악 활동입니다."
기씨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지만 결국 치유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한다. 자신들의 음악에 귀 기울이고, 눈물을 흘리는 환우들을 보면서 ‘음악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라고 느꼈다. 영혼을 씻어주는 것, 치유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게 있다면 음악임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음악 하는 사람도 크든 작든 자만의 사상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저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는데, 바로 ‘음악은 인간에게 평화이고 행복이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이 같은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선율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가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 노래에 천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기씨는 아름다운 시에 선율을 입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틈만 나면 시집을 읽는데, 좋은 시를 만날 때 마다 선율화 하고픈 욕구가 인다. 좋은 작사도 많지만, 시 속에는 보이지 않는 ‘큰 우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수록 또 곱씹을수록 깊이가 더해졌다.
그 중 유안진 시인의 ‘내가 가장 아프단다’는 기씨가 가장 아끼는 시노래 중 하나다.
"시가 참 철학적이예요.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다’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내용이에요. 이처럼 시에 담긴 의미를 오롯이 전달하면서, 함께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시 노래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이처럼 그는 가사전달에 힘을 쓴다. 노랫말이 곧 그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밴드 구성을 갖는 것 보다, 통기타 하나만 잡고 무대에 서는 모습에서 그가 노래로서 선물코자 하는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사실 기타 하나만 가지고 노래하는 일은 참 외로운 일입니다. 노래가 가진 매력을 십분 살려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요. 밴드가 뒤에서 받쳐주면 노래하기에도 재미가 있고, 편하거든요. 하지만 기타와 노래가 단독으로만 매치됐을 때, 화려한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소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물론 가사에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도 효과적이죠."
요즘에 그는 아들과 노래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아빠의 뒤를 열심히 좇아온 아들 드온씨와 ‘부자밴드’를 결성, 양림쌀롱, 대구 달빛통맹 콘서트를 비롯해 이번 어버이날 특별공연까지. 어엿한 듀엣으로 함께 호흡을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아들의 음악 활동을 만류했던 그이지만, 이제는 아들 편에 섰다. 음악 할 때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했던 그의 지난날이 떠올라서다. 지금은 둘도 없는 가족이자, 음악적 동지로 나란히 성장 중에 있다.
"음악적으로 충돌할 땐 날카롭게 부딪혀요. 아무래도 세대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서로에게 ‘득’이 되더군요. 지나온 세월에서 표현되는 감수성은 제가 앞서고, 트렌드를 따라가는 기민함은 아들이 저보다 훨씬 낫죠.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풍부한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올해 그는 시노래가 주축이 되는 독집 음반 하나를 준비 중에 있다. 앨범명은 ‘사진관 집 소녀’다. 이름에서도 풍겨지듯 앨범 주제는 노스텔지어(향수)다. 지난 옛 추억들 중 떠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는 일들, 그리움이 주는 행복들을 끌어 모아 앨범에 담아낼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에 대해서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선한 영향력’이란 단어를 꺼내든다.
"쭉 음악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기현수란 가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음악을 해 온 이유, 또 하고자 하는 이유는 음악만이 저 기현수를 가장 가치 있게 해주기 때문이에요. 정말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예술인으로 남고 싶어요. 맑고 고운 목소리에 담아낸 선율로, 치유의 힘을 전하는 가수로 오래 오래 노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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