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호 제83호=한재섭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사무처장)다시 지원사업 계절이 돌아왔다. 예술인(예술단체)들에게 봄이란 계절은 <사철가> 한 대목처럼 "봄은 찾아왔건만 세상사 쓸쓸하더라"로 요약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지역단위 문화재단, 그리고 장르별로 설립되어 있는 각종 위원회와 문화예술 공공기관들의 1년 지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가 봄이다. 대개 전년도 12월부터 공모가 시작되어 4월이면 대부분의 공모사업이 마무리 된다.
공모사업 선정발표가 행정적으로 마무리될 뿐이지 실제 예산교부는 사업계획서를 다시 수정하고 협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이루어지니 5~6월이 되어야 예술가들은 올해 농사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공교롭게 이 시기가 근대화시대 농민들의 보릿고개와 같아 21세기 한국의 예술인들에게도 봄은 아직도 소작료와 빚, 세금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계절이다.
찬란한 봄을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지난해 지원사업의 정산 마감이다. 올해 농사도 어떻게 될지 몰라 세상사 쓸쓸하기만 한데, 정산작업은 영혼이 탈탈 털릴때쯤 되어야 끝이 난다. 실상 예술인들에게 회계사 수준의 지식과 능력을 요구하는 정산시스템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그럼 회계사가 되지?왜 예술인이 되겠는가?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정산할 수 있다는 e-나라도움을 비롯해 지자체 정산방식에 대해 예술인들은 아직도 적응중이다.
그뿐이 아니다. 예술인들은 지원사업을 통해 진행되는 예술의 창의적인 과정과 결과물에 대해 지원금외에 어떤 지원이나 비평도 듣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공공기관도 그저 ‘법과 규정이 그러하니‘ 법과 규정에 맞춰 지원사업을 신청하고 정산을 하는 것이 예술인들의 가장 큰 업무로 인식할 뿐이다. 즉, 국가예술정책이라는 거대한 성벽앞에서 예술인들은 문제없이 과업을 수행하는 하청업체 이상 이하도 아닌 셈이다. 카프카가 「성」에서 묘파한 끝내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K처럼 예술인들은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에 대한 비평이 아닌 행정업무로 평가를 받을 뿐이다.
이쯤 되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비참한 신세한탄이 이어지며 망할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나선 지난 인생사 무정함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그마저 지원사업에 떨어진 예술인들은 이제 국가로부터 쓸모없는 예술가로 인정받아 ‘빈대도 낮짝이 있다’는 속담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한 해를 보낸다.
누가 우리에게 예술을 빼앗아 갔는가? 정부다. 세금이다. 지원사업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척도인 문서이다. 실체는 없고 페이퍼만 있는 페이커컴퍼니처럼 문서만 맞으면 되는 페이퍼공화국의 예술 정책은 거꾸로 페이퍼만 증빙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페이퍼예술가들을 양산해낼 뿐이다. 10여년전 공공기관 들러리 잘 서주는 착한 예술가에서 진화하여 이제 당당히 제 몫은 알아서 챙기는 관료화된 예술가만이 살아남는다.
최근 발표된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정경운 교수의「예술지원정책이 지역 예술생태계에 미친영향연구-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호남학66』(2020.01,전남대 호남학연구원)논문은 그 내용의 핍진함으로 뼈를 때린다. 100명의 예술인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조사 연구분석으로 구성한 논문에서 드러난 사실은, 예술인들은 지원사업에 적합한 절차와 내용에 맞춰야 하는 지원사업의 작업과 자기 본래의 작업을 분리하여 예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는 예술인들의 아마추어화와 창작물의 인스턴트화를 양산시키며, 지원사업을 받는 예술인들이 스스로를 악순환과 노예화에 갇힌 예술가라고 자조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공공에서 하는 문화예술은 공짜라는 인식외에는 향상된 것이 없는 시민들의 문화향유권은 말해 무엇이겠는가? 해마다 3조 6천억원(2017년 기준)이 투입되는 문화예술 공적자금 앞에서 예술인은 증발되고 정산보고서 밖에 남지 않은 페이퍼공화국과 페이퍼예술가들. 이제 결과와 예산중심의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예술인들의 창조적 축적의 시간이 공동체의 문화민주주의 실현과 감수성 확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진짜 예술정책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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