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그룹 정치인들 ‘부채의식’ 갖고 있어

[커버스토리] 김승남 국회의원
"어려운 삶을 영위하는 희생자들, 진정한 민주화 주역"
‘전대협 출신 정계 진출 1호’…가슴으로 정치하는 사람
교육받지 않으면 ‘시대 요구’ 속도 있게 담아내지 못해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0년 10월 04일(일) 18:14
(2020년 10월호 제89호=이성오 기자)"김승남 의원은 가슴으로 정치하는 사람입니다. 머리로 또는 의지로, 소명의식이나 시대정신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정치인은 많지만, 사람을 중심에 두는 걸 잊지 않는 정치인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김 의원은 참 귀한 인재입니다."
국회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가 지난 2015년 고흥에서 연 연찬회에서 당시 이낙연 전남도지사는 더불어민주당 김승남 의원을 이렇게 평했다.
1965년 고흥 풍양면 태생이다. 초·중교를 나온 뒤 광주로 올라와 전남고등학교,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3남매 중 장남으로, 어린 시절 꿈은 문학가였다. 소질이 있었고, 고교 선생님도 권유했다.
그가 시대의 아픔에 귀를 열게 된 것은 고교 2학년 때 박관현 열사의 옥중 사망이었다. 전남대총학생회 회장이었던 박 열사는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붙잡혀 재판받던 중 단식투쟁 끝에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전남대와 가까웠던 탓에 시위는 전남고까지 번지고, 운동장에는 최류탄과 선전물이 뿌려지기 일쑤였다. ‘광주시민 여러분 오늘 저녁 7시 충장로우체국 앞에서 모입시다!’ 그는 교정에 뿌려진 이런 내용의 선전물을 칠판에 붙이기도 했다.
2년 후 전남대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1980년 신군부의 권력 찬탈과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가 중·고교에서 받은 교육이 너무 편협하고 폐쇄적이라고 느꼈다"고 그는 털어놓는다.
김수영, 김준태 등 현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을 좋아했지만,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으니 글을 쓸 수 없었다. 문학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지금은 사회개혁과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5·18 진상을 규명하고, 군사독재가 종식돼 민주정권 들어서야 이 나라가 제대로 서겠다’고 생각했다.
학원 자율화 바람이 불면서 학도호국단이 총학생회로 바뀌던 때였다. 동아리 모임보다는 학회 활동이 더 활발해졌고, 그는 학회 활동에 상당한 성과를 올리면서 국어국문과 학생회장이 됐고, 이어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쨍그렁!’
1987년 8월18일, 한밤 충남대학교 교정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어디야?"
이인영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의장과 김승남 전남광주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남대협) 의장 등은 회의를 중단했다. 유리창이 깨진 곳은 남대협 학생들이 짐을 푼 학사였다.
지난달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약속한 대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 전대협 결성 준비를 하던 차였다. 남대협 학생들은 태풍이 닥쳐 피해를 입은 논산에서 수해복구활동을 도운 뒤 대전 유성구에 소재한 충남대까지 걸어와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소그룹 토의를 하던 중에 ‘제헌의회그룹’이 들이닥쳤다. ‘파쇼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하는, 1980년대 운동권 정파 그룹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노선이다. 남대협 숙소에 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제헌의회 구성이 먼저라며 집요하게 토의를 방해했다. 참다못한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 한 사람이 유리창을 깬 것이다.
"수해복구 활동으로 피곤한데, 토론은 좋지만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마라. 그럴 거면 중지해 달라."
그는 제헌의회그룹의 주축인 성균관대학생회장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제헌의회그룹 학생들은 다음 날 충남대에서 시위까지 벌였지만 큰 물줄기를 막을 수 없었다. 전대협은 결성됐고, 이인영 서대협 의장이 초대 의장에, 김승남 남대협 의장이 부의장에 각각 선출됐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그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다.
1987년 전남대에서 거행된 이한열 열사 추모식 당시 모습.

‘12·12군사반란자 처벌촉구 전국대학생 민정당사 규탄시위’ 배후 주도 혐의였다. 이듬해 6·10항쟁 남북청년학생회담 촉구 시위 때 구속돼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그해 12월에 석방됐다. 1989년에 복학해 학교를 마쳤고, 1990년 군에 입대해 1993년 2월에 제대했다.
고향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거들던 그에게 1993년 7월 민주당 이기택 대표최고위원실에서 문희상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총학생회장 출신을 비서실에서 영입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손용후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비서실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첫 직장이 됐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정치에 뛰어든 배경을 물으니 "6월 항쟁이 끝난 뒤 국민은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그런데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부합하지 못했다. 학생운동 결과를 살려 민주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돼 3당 합당을 하니 회의가 들었다. 제도권 정치에 들어가 민주진영이 반드시 집권하도록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인영, 우상호 등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동기들과 소통하면서 이런 얘기들을 해왔다. 언론에서는 ‘전대협 출신 정계 진출 1호’라고 했다. 이때부터 전대협 출신들이 제도권 정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농어촌 문제에 대한 관심도 정계 진출에 한몫을 했다.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쌀 수입 개방이 시작돼 피해가 커지니 정치권에 들어가 농어민의 생존권을 대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른 나이에 정치권에 뛰어든 탓에 시련도, 실패도 많았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경기도 광명을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당시 DJ가 귀국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니 노무현, 유인태 등과 ‘꼬마 민주당’에 남게 됐고, 철저한 지역구도로 치러진 선거였다.
전대협 동지들과 의논 끝에 광주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1999년 연청 전남도지부 사무처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인터넷 관련 회사를 차려 사업을 하기도 했다. 2003년 박상천 의원의 권유를 받아 보좌관을 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이 탄생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됐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초라한 규모의 야당이 됐고, 박 의원과 민주당계로 남게 됐다. 86그룹은 열린우리당 깃발을 들고 대거 여의도에 입성했다. 박 의원이 그에게 지역구를 물려줬다. 19대 총선에서 첫 금배지를 달았다.
이런 경험들은 그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를 안겨 줬다. 입당한 정당마다 총선을 앞두고 둘로 나뉘거나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서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야권통합 요구가 거세던 때 안철수 세력은 문재인 당 대표에게 전당대회를 요구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전대를 해서 리더십을 세우면 되는 일인데, 공천권을 놓고 서로 다투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당시 지역민들도 그에게 ‘국회의원 하려면 탈당하라’고 거세게 요구했다. 결국 국민의당 경선에서 실패하고 그는 무원칙한 공천 룰과 경선에 승복할 수 없다며 두 달 만에 민주당으로 다시 돌아왔다.
"정치하면서 느낀 것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해 1995년 지방선거를 치를 때다. DJ는 경기도지사 공천을 놓고 이기택 대표와 갈등을 빚다가 이 대표에게 공천권을 양보했다. 당시 민주자유당은 이인제 후보를 공천했다. 만약 DJ의 뜻대로 이종찬씨를 공천했다면, 이인제 후보가 경기도지사가 될 수 있었을까? 당시 경기도지사 선거는 DJ 뜻대로는 안됐지만, 후에 자신의 대통령 선거에서 큰 이로움으로 돌아온 것이다.
4년 만에 여의도 정가에 돌아온 그는 "당면 과제는 정권 재창출"이라고 했다. 정권을 지켜내는 일이 더 어렵긴 하지만, 우리 당이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기에, 기대치가 아직은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거리유세에 나선 김 의원

정치 인생 목표는 "한반도 분단 구조를 혁파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작금의 형세나 남북관계 흐름으로 보면 통일은 우리 세대에서는 요원하고 버거워 보인다. 그렇지만 남북이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고 평화 협정을 맺는 정도까지는 가야 한다. 통일을 위해 전초적으로 이뤄내야 할 일이다. 서로 교류를 확대하고 평화롭게 왕래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꼭 이뤄내야 할 목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시대가 해온 일들의 절반 이상을 이루는 것이니 만족할 수 있겠다고 했다.
8·29전당대회서 전남도당위원장에 선출됐다. 최우선사업은 ‘지방정치인을 발굴하고, 교육하며, 선거에서 당선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이다.
풀뿌리 지방자치가 민선 7기까지 왔다. 변화가 필요하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에는 지도자의 정치적 이념과 행동양식을 배워왔다면, 이제는 전문화된 사회개혁, 농어촌개혁을 끌어 낼 역량이 필요하다. 전남도당은 민주당의 메카이자 뿌리인데 그런 역할이 없어 아쉬움이 많다. 시스템을 갖추려면 연수원이 필요하다. 최근 연수원 설립을 가로 막는 정당법을 고치려고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연수원에서 전문적으로 당원을 교육하고 인재를 발굴해 거대한 엘리트 관료집단을 설득해내고 이끄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급하다. 국민이 요구하고 사회가 바라는 전문성과 논리로 정치인이 무장되지 않으면, 시대의 요구를 속도 있게 담아낼 수 없다. 정치인은 교육 받고, 훈련 받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아침 햇살 속에 이런 얘기를 듣는데 사무실이 시나브로 밝아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지난 9월16일 "목숨을 걸고 싸웠던 1987년 민주화의 주역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시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됐다"고 86그룹을 작심 비판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답을 들었어야 했나? 전화를 걸려다가 수첩을 다시 뒤적인다. 직답은 아니지만 쓸만한 얘기가 생각나서다. 김 의원에게 "지금까지 ‘인생의 고비’라고 여길 만한 일이 있다면?"이라고 물었을 때의 답이다.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외길을 달려오면서 사회개혁을 외쳤고, 정치권에서 양극화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인들은 내 인생이 ‘평탄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개혁을 애써온 다른 사람들과 견준다면 결코 굴곡이 심하다고 말할 수 없다. 1980년을 전후로 수많은 학생운동 선후배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예를 들어 84년 학원자율화가 시행되면서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 학생들의 시위를 막아보려고 그런 제도를 만들었지만, 학생들은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뜻으로 종종 시험을 거부했다. 총학생회가 거부 결정을 했을 때 다수의 학생들은 희생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따른 것이다. 학생운동권을 탄압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만들었지만, 결국 희생자는 평범한 학생들이 됐다. 기꺼이 함께했던 학생들, 시민들이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이다."
‘86그룹 정치인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잠시 망각하며 지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과거 민주화운동 대열에 함께했던 정치인들은 그런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 영향을 받아 그것을 대변하는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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