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람들의 삶 스크린에 담아요"

마을회관서 제작 회의·주민 아이디어 영화화
소시민 삶 스토리텔링 ‘기억저편’ 등 19편 제작
"지역 정서 오롯이…마을영화 허브 구축 기대"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3월 04일(목) 18:17

(2021년 3월호 제94호=글 박세라 기자)

찐한 사투리가 그대로 대사가 되고, ‘오메 틀려부렀네’ 웃으며 고개를 젓는 순간도 걷어내지 않는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정겨운 말투들, 지금 당장 버스에만 올라타도 들려오는 생활 언어들이 스크린에 옮겨진다. 익숙하지만 그래서 또 어색한 그 미묘함이 마을영화의 마력이다.
윤수안 감독(필름에이지 대표)은 10여년 마을영화 제작에 공을 들여왔다. 광주·전남 곳곳의 마을을 돌아보면서, 마음에 드는 곳에 눌러앉아 영화를 찍었다. 마을회관에서 제작회의가 이뤄졌고, 주민들이 한두 마디씩 보탠 것들이 탄탄한 스토리라인이 돼 영화에 담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개버선’, ‘아람차고’, ‘춘섭아’, ‘기억저편’ 등 19편이다.
마을영화의 첫 시작은 화순 도암면의 도장마을에서다. 윤 감독은 도장마을의 귀한 문화적 자산인 ‘밭 노래’를 주제로 영화 제작에 나섰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밭 노래를 채록했고, 50곡을 영화제작에 활용했다. 단순히 문화 자원을 영상으로 아카이빙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영화 촬영 현장의 중심에는 마을 주민들이 등장, 주·조연을 도맡았음은 물론이고, 아흔이 넘은 마을의 최고령 할머니도 출연했다. 2011년 제작된 첫 작품 ‘개버선’이 마을영화의 첫 작품이다. ‘개버선’은 도장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밭 노래의 제목 중 하나다. 지독한 시집살이를 견디며 살아가는 며느리의 애달픔을 해학적으로 풀어냈는데, 이 또한 동네 어머니들의 생생한 시집살이의 ‘증언’들을 모아 스토리텔링 한 것이다. 여기다 무성영화 시절 극의 해설을 맡았던 ‘변사’가 등장해 전통 해학극의 면모를 보여줬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마을영화가 뼈대를 잡아가는 그 과정이다. 날 것의 이야기들을 하나 둘 꺼내 놓기까지 윤 감독을 중심으로 한 스태프진과 마을주민들의 찐한 유대감이 전제돼야 한다. 이들이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앞서 매주 마을을 찾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윤 감독은 "어느 날 짠하고 가서 주민들과 영화제작에 호흡을 맞출 순 없다. 마을 주민들이 외부에서 오는 스태프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사실 마을주민들과 ‘라포’가 얼마나 긴밀하게 이어졌는가는 영화 성공의 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주민들과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제1의 과제다"고 꼽았다.
이를 위해 그는 매주 마을을 찾았다. 빈손으로 가 얼굴만 비추는 게 아니다. 장구나 꽹과리 등 어르신들의 마음을 열 필살기들과 함께였다. 스태프들은 전문 강사를 초빙, 해당 마을에서 국악·민요 교실을 열었다. 한 시간 정도 함께 노래하고 악기를 두드리다가, 잘 놀았구나 싶을 때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화란 무엇인가란 이론적인 눈 맞춤 설명부터 시작해 카메라를 직접 만져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르에 익숙해져야만 제작 과정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가 있어야만 ‘영화판’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나주에서는 마을의 경로당을 배경으로 한 ‘경로당, 익수’, 나주목사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과 합을 맞춘 ‘고마워요, 나무님’ 등을 제작해 선보였다. 짬이 나면 마을회관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텔레비전을 보던 마을 어르신들의 일상적 패턴이 윤 감독 사단이 드나들면서 전에 없는 활기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 중 영화 ‘택촌이야기’는 마을의 느티나무 벌목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담아, 실제 영화 상영 이후 나무 벌목 계획이 철회되는 긍정적 변화도 이끌어 냈다. 마을영화가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낸 셈이다.
윤 감독은 "최근 독립영화에서 조차도 서울 그리고 지역의 독립영화로 구분 짓는다. 같은 독립영화라도 서울에서 제작된 것과 광주에서 만들어진 것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며 "장르적인 소외에 더불어 지역적인 소외까지 더해지고 있다. 마을영화는 이 같은 ‘소외’를 역으로 이용해 ‘기회’로 삼은 장르"라고 설명했다.
그가 꼽는 대표작은 2019년에 제작한 장편 ‘기억저편’이다. 작품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중흥동 재개발과 관련해 만들어졌다. 주민들 간의 의심, 투기 등 재개발과 관련한 좌충우돌 이야기가 코믹하면서도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묵직함으로 그려졌다.
아마추어 배우들, 특히 고령의 어르신들과의 촬영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난제는 대사 외우기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일인데다, 70대 고령의 배우들이 많아 한 두 문장만 넘어가도 배우들이 힘들어 한다. NG가 난무하는 현장이지만 무슨 일인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전문 배우들은 NG가 나면 ‘죄송합니다’고 외치는 반면, 주민 배우들은 허허 웃어버린다. 그러면 앞에 배우들은 물론이고 제작진들까지 웃고 만다. 주민들에게 영화촬영이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여지는 덕이다. 그래도 영화는 진행돼야 하기에 수를 쓴 게, ‘수제 프롬프터’다. 배우들의 대사를 스케치북에 써서 카메라 뒤로 붙여두고 촬영을 잇기도 했다.
윤 감독은 "전문 배우들은 캐릭터를 만들어간다고 본다면, 주민들은 오롯하게 자기화 시켜낸다. 자신 본연의 목소리, 삶의 톤, 억양에 꾸밈없이 대사를 치기 때문에 너무나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마을 영화 제작이 끝나면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윤 감독이 영화 제작 과정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전 과정에 주민들이 참여해 땀을 흘린 만큼, 그 결과물을 공유하는데 있어 통 크게 판을 벌이는 편이다.
스타들만 밟을 수 있는 ‘레드카펫’이 동네 길바닥에 깔리고, 마을영화 주연배우들이 줄지어 입장한다. 대형 스크린에는 주연배우로 열연을 펼치는 주민들이 등장하고, 상영 후에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마련됐다. 여느 영화제 못지않은 구성이다.
스크린에 담은 소소한 이야기가 막을 내리면, 진짜 삶의 이야기는 영화제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그는 영화제에서의 풍경까지를 모두 한 편 작품의 연장선이라 본다. 그가 2016년부터 중흥동에서 이어온 ‘간뎃골영화제’도 이와 결이 같다.
윤 감독은 "대부분 주민들은 처음엔 ‘우리가 영화를?’ 반문을 한다. 영화란 매체가 전문적인 사람들 또 특수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며 "평범한 이들의 삶도 영화적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스크린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할 수 있음을 영화 제작 과정에서 모두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
올해 그는 마을시트콤을 제작 중이다. 여러 에피소드를 엮어내는 시트콤은 첫 도전인데,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주민들이 늘어 재미난 스토리들은 물론, 인력풀도 충분한 상황이다. ‘코로나시대 건강관리법’, ‘코로나시대 낯선 사람들’ 등 ‘코로나19’로 인해 겪는 일들을 스토리텔링, 4편의 에피소드를 선보일 예정이다.
윤 감독은 마을영화가 품은 가능성을 본다. 소시민의 삶에 밀착, 지역 정서를 담아내는 유일한 장르라는 믿음이다.
그는 "마을영화에는 광주의 이야기, 사투리, 언어가 오롯이 담긴다. 광주 곳곳 동네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광주에서만 만들어 낼 수 있어 귀하다"며 "광주에 ‘마을영화 허브’가 구축되길 희망한다. 마을영화가 퍼져서 각 구마다 대표 마을들이 생겨 자연스럽게 마을영화의 새로운 무대가 열리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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