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빼꼼 내미는 봄을 분명 보았다

문득 여행(도심 호수, 느리게 걷다-풍암호수에서)
흙과 덕석, 데크길 오가며 지친 심신 위로를
시화 작품들 읽으며 각박해진 감성 일깨워
숲속 의자 앉아 ‘쉼’…작은도서관서 독서도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3월 31일(수) 15:54

(2021년 4월호 제95호=글 고선주 기자)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겨울잠을 자던 벌레, 개구리 따위가 깨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경칩(驚蟄)이 지나서였을까. 오전 10시가 안된 시간이었지만 수변을 걷는 시민들이 의외로 많았다. 마스크를 썼을 뿐 이런 사람 행렬이 오히려 코로나19 이전처럼 보였다. 코로나19 재확산 여파에 따라 시민들이 갇혀 지내다보니 답답했을 터다.
멀리 갈 수 없는 노릇이니 가까운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앞전 광주천변에 산책 나갔을 때도 많은 시민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도심 공원마다 이처럼 많은 인파들의 발길이 넘쳐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가 지속되고 있지만 세상이 멈추지 않았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선 근래 날씨가 확 풀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매화는 꽃망울을 터트렸고, 동백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복어 입처럼 부풀어 올라 있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터질 듯하다.
이번 풍암호수로의 문득 여행은 두번째다. 일전에 한 차례 다녀온 바 있다. 그때는 여름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긴 겨울을 지나 우리들 곁으로 바짝 다가온 봄을 걸으면서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다. 이외에 올해 축조 70년을 맞은 해여서 나름 역사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심결에 건성으로 호수를 거닌 시민이리면 이곳에 숨은 진주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앞 매거진 94호에서 다룬 전평제는 코스 길이가 767m로 아담하지만 이곳 풍암호수는 산책로가 2㎞가 넘는다. 한창 걸어야 일주할 수 있는 거리다.
요즘 애완견 입양 문제로 골치가 아프던 차에 나서던 길이었다. 담양 병풍산으로 갈까 하다가 골치 아파 운전에 집중을 하기 어려워, 어차피 도심 호수를 모두 답사해볼 요량이었기에 봄이 오는 풍암호수를 다시 찾아 보기로 했다.
전평제와 닮은 듯하면서도 꽤 다른 곳이 풍암호수다.
누구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난 일상들이 없을 수 없다. 일상을 꾸려가다 보면 평정심을 잃을 일 얼마든지 있다. 그때마다 가까운 공원이나 천변을 걸으라고 했던 게 문득 스쳐 지나갔다. 화를 폭발하기 보다는 그것을 잘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다. 그중 하나의 방법이 걷기다. 걷는 데 짧지도, 길지도 않는 적정한 코스하다. 눈요기를 하기에는 장미 등 꽃이 피지 않아 감탄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담담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화사한 꽃들이 빠진, 회색빛 순자연의 풍경같다고나 할까. 날것 그대로의 풍경이라 고집해본다. 음식으로 치자면 샐러드인데 거의 드레싱을 가미하지 않은 상태 말이다.
사실 풍암호수에 오는 데는 호수에 작은 도서관이 있고, 각종 시화(詩畵)들이 설치돼 있어서다. 둑방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화살표로 출발점이라고 쓰여진 푯말이 나온다. 바로 그 옆에 바로 호수의 첫번째 시화가 서 있다. ‘사랑도/얼마나 지극한 사랑이기에//호수는 평생/하늘을 품고 살고//하늘은 평생/호수의 품을 떠나지 않네’라는 교육자 출신 강만 시인(전 광주문인협회장)의 ‘호수’가 인파들을 맞는다. 수변 산책로는 잘 닦여져 있다. 흙길과 멍석 혹은 덕석을 깔아놓은 듯한 길, 그리고 목교에서의 데크길을 오갈 수 있다. 흙길이 제일이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흙길에서는 밝을 때마다 눈길을 밟을 때와 같은 소리가 난다. 긴 겨울 목이 말랐던 것일까. 이날 오로지 운동 목적 만으로 걸었다면 감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수변 산책로를 따라 제1목교를 건너 계속 진행했다. 초행자들은 여기서 건너 안쪽에 설마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을까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1목교 상류에 자리한 장미원의 주인인 꽃들은 아직이다. 4∼ 5월이면 꽃 구경을 위해 더 많은 시민들이 산책나올 것이다. 풍암 호수가 더 인기를 얻는 이면에는 장미원의 화사한 꽃들 덕이다. 그 꽃을 보기 위해 상춘객들이 몰려들어서다. 코로나19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듯 싶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게 코로나19 상황이어서 기적적으로 전국 확진자가 50명 미만으로 내려가면 명소를 입증할 것이다. 텅빈 장미원에서는 화사한 그날을 맞이하기 위한 인부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필자는 오히려 인파에 휩쓸리지 않아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제1목교를 건너 오래된 나무 아래 의자에 잠시 않아 숨을 가다듬었다. 앉아서 걷는 사람들을 본다. 모두 마스크를 해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점은 아쉽다. 사람 구경이 더 무료해졌다. 다시 이동했다, 얼마 안가 거대한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2010년에 설치된 미디어아티스트 진시영씨의 작품 ‘하모니’(Harmony·화합)였다. 이 작품은 빛고을 광주의 ‘光’을 형상화해 역동적인 모습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인간의 모습과 서로 화합해 빛을 받드는 모습을 조형화했다.
하모니를 배경으로 사진 몇장 촬영한 뒤 제2목교를 건너 황토빛 흙길을 밟으며 흐릿한 회색빛에 가까운 하늘을 보며 간다. 바람 한점 없는 날, 호수의 여울마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듯 고요하다. 하지만 식물들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푸른 빛과 하나 둘 꽃망울이 봄의 향연을 펼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팥배나무나 왕벚나무 버드나무 갯버들 히어리 비비추 다 돌아올 것이다. 이들 식물이 제자리로 돌아올 무렵 맹꽁이나 두꺼비, 참개구리의 우렁찬 울음소리도 호수의 물살에 얹혀질 것으로 믿는다.
이곳 호수에는 자연친화적 생각을 실천 중이다. 나무에 상처를 주지 않는 가운데 의자를 둘러쳐 설치하거나 군데군데 산속 의자를 설치해 둬 쉬었다 갈 수 있게 배려했다. 원색으로 처리된 의자들이 숲에서 너무 튀거나 일부 의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은 흠으로 다가왔다.
이동하다 호수를 다시 들여다본다. 물빛이 혼탁해 보였다. 마치 녹조 직전처럼 말이다. 호수는 어쩌면 변신을 위한 화장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오리떼의 분주한 발길질을 봐서는.
오가는 사람들은 그저 지나쳐 흘러갈 뿐이다. 호수의 낯빛은 점점 봄빛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 사이 풍암호수작은도서관에 다다랐다.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 남성 두명이 그동안 거칠게, 숨차게 달려온 삶을 달래고 있는 듯했다. 호수가에서 읽은 책이 가져다주는 맛은 그냥 도심지에 있는 도서관에서의 독서 느낌과는 결을 달리할 것이다. 있을 책 다 있는 도서관에서 잠시 책 구경을 한뒤 나와 시화들과 몇몇 화분의 꽃을 접했다. 성질이 급한 놈들은 벌써 푸르름을 더했지만 많은 화분에는 아직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호수가를 빙 둘러쳐진 나무들 역시 아직은 회색 빛이었다.
제3목교 중간에서 호수가에 설치돼 있었던 시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를 되뇌였다. 교육이나 심리치료, 명상 등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일부다. 삶은 수없이 흔들린다. 삶에도 겨울은 있고, 봄은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모두 힘들다. 아파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모두 자신의 사는 곳 주변의 호수와 공원을 찾아 천천히 걸어보시라 강추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쩌면 마음의 평화와 동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년째 코로나에 묶인 삶이지만 호수를 돌면서 머리를 빼꼼 내미는 봄을 분명 보았다. 둑을 내려오는데 주차장 끝자락에 젊은 노점이 차려지고 있었다. 봄을 한가득 펼쳐놓았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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