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너머 풍경에 마음이 축축하게 적셨다

업그레이드 안된 네비 안내 따라 국도 달리며 곳곳 답사
울돌목과 진도대교 거쳐 소소한 금갑·강계 산수에 취해
유구한 자산 보존·발전하길…한국시화박물관·쏠비치도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7월 22일(목) 10:17

(2021년 7월호 제98호=글 고선주 기자)
날씨가 가물가물거린다. 조금은 축축한 날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여름비를 아침부터 맞아야 했다. 진도는 100㎞가 넘는 거리여서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방문하기 힘들다.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국내 세번째로 큰 섬이다. 제주도의 6분의 1에 불과하지만 ‘섬이 크면 얼마나 크겠어’ 하고 방문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는 곳이 진도다. 광주에서 진도까지 100㎞가 넘으니 전남 북부인 영광이나 장성, 구례, 곡성 등지에서는 방문하기가 더 수월하지 않을 터다. 전남은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이어 세번째로 큰 지자체라고 하니 끝과 끝의 경유는 마치 타 지자체를 다녀온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그곳에 다녀오면 저녁에 잠이 잘 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진도가 꼭 그런 곳이다. 남도의 가장 끝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광주·전남 북동부 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필자 역시 진도를 방문한 것은 팽목항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시 낭독 등 다섯손가락으로 꼽을까 말까 한 정도다.
진도를 둘러보자고 한 것은 그곳에서 시에그린 한국시화박물관이 개관하는 날이어서 진도를 방문지로 선택한 것이다. 먼데다, 비까지 오니 그리 탁월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중기행도 경험을 쌓으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 끝에 진도로 향했다. 진도는 오는 시간, 가는 시간 빼면 현지에서 몇군데 들르지 못하고 여정이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번 방문이 그렇다. 오전 10시30분 쯤에 출발했지만 점심은 오후 1시 넘어 가능했다. 진도대교 인근에서 점심을 하고서 진도 대교 전경 사진을 몇 컷 촬영하고 부랴부랴 시에그린 한국시화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개관식이 오후 3시였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도중, 이번 여정에서는 무조건 명승지만 쫓아다니지 말고 소소한 풍경들에도 눈길을 주자고 다짐했다. 무슨 여행 하면 무조건 이름난 관광지만 둘러보고 하는 식의 습관을 고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훑고 지나간 곳, 명승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곳을 찾아 눈도장을 찍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균일화된 여행 눈높이를 맞추고서 ‘여행을 잘 했다’는 구태(?)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감상 재탕은 하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도는 굉장히 큰 섬이다. 인터넷을 뒤져 봐도 모두 명승지에 대한 찬사가 넘쳐났다. 비까지 오다보니 이번 여정 역시 마음과는 달리, 인증된 곳들에의 유혹이 일어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 여겨졌다. 그래서 이동하며 눈에 띄는 곳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다지 이름을 얻지 못한 곳이더라도.
아무래도 명승지 안팎을 넘나들듯 싶은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시간에 쫓기는 여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먼저 이동하던 중 얕은 구릉을 타고 올라가는 전답의 풍경에 차를 세웠다. 금갑마을 이정표가 세워진 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냥 전답이 자리한 곳이지만 초록 빛깔과 고랑들, 전답 사이로 빠져나가는 길, 언덕빼기 제일 위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완만하게 치고 올라가는 경사면의 모습, 전답과 수목들의 경계, 그리고 그것을 감싸안은 흐릿한 하늘이 한폭의 풍경화 그 자체였다.
한국의 산야는 어찌보면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 유심히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해보면 너무 아름다운 것이 우리네 산야가 아닌가 싶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의신면 언덕빼기였다.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구릉을 치고 올라가는 선은 언젠가 신안 안좌도 두리 건너 박지도의 언덕빼기 풍경과 흡사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능선은 완만하게 치고 올라가 사뿐하게 그 너머로 넘어간다. 바람도 넘나들 수 있을 만큼의 기울기에서 오히려 일상의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 금갑마을 언덕빼기 풍경을 눈에 담은 것은 백번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았다.
이동하던 중 지명을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의신면을 지나 업그레이드 안된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달리다 보니 임회면 강계 마을에 다다랐다. 강계 마을은 바다와 농어촌, 산촌의 느낌을 모두 가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향해 바라보면 길이 산 속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뱀이 구불 구불 언덕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적당하게 구불 구불 거리고 있는 길이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길이었다. 길들은 모두 골목을 끼고 돌아나간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진행되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게 우리네 길이다. 강계의 길은 그렇지 않았다. 끝이 어디일까 궁금해 가보고 싶은, 그런 길이었다. 마을 앞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일출이든, 일몰이든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 멀리 산이 끝나는 지점과 또 산이 시작되는 경계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 경계 쯤에 해가 걸려 있다면 엄청난 풍경을 목도했으련만 우중으로 인한, 흐린 날씨가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조그만 배들이 잔잔한 호수에 떠 있는 듯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늘도 양심이 있는 것일까. 먼데서 온 객에게 초점이라도 흔들리지 말고 바다 풍경 실컷 구경하라고 물살을 붙잡고 있는 듯 했다. 요란을 떠는 날씨 덕분에 고요한 바다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몇 군데서 풍경에 팔려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에그린 한국시화박물관 개관식은 오후 3시였지만 한참 지각했다. 행사를 하지 못할 정도의 비는 아니었지만 점점 더 굵어졌다. 맞으면 옷이 젖을 게 뻔했다. 행사를 설치한 막사 밑으로 비를 피했다. 한동안 개막식 행사를 지켜보다가 분주한 주인장을 보기는 어려울 듯 싶어 시화박물관 내부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입실해 접한 전시들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몇 발짝 옮기지 않고 "제대로 공간 구성을 했네", "정말 모든 것 다 쏟아 부었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대개의 형식적인, 참신하지 못한, 천편일률적인 문화공간들을 그동안 많이 접해온 필자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대충 대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시 중인 시화들과 수석, 회화, 유명 문인들의 친필 등 다채로운 전시 작품들이 내용과 형식 모두 수준 이상의 것들이었다. 운좋게 건물을 빠져나오는 사이, 김소월의 스숭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근대 최초 개인 창작시집) 원본을 구경한 것은 이날 최대의 관람이었다.
운동장 곳곳에 설치된 조각작품들 또한 반듯하게 정돈돼 잘 꾸며져 있어 향후 진도의 또 다른 문화명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일었다. 주인장인 이지엽 경기대 교수를 인터뷰한 뒤 이곳을 빠져나와 세방낙조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지그재그로 도는 모양이었다. 거리감각이 없고, 길치인 덕분으로 동서남북을 횡단한 듯 싶다. 그래서 시간이 더 빠듯해졌다.
세방낙조는 지산면에 자리하고 있다. 진도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세방낙조를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일몰의 장관은 국내 그 어떤 곳에 견줘도 압도적인 곳이다. 진도에는 둘러볼만한 곳이 천지다. 그중에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세방낙조다. 흐린 날씨 탓에 일몰은 접하지 못했지만 원래 가지고 있는 풍경에도 아쉬울 게 하나 없었다. 다만 생각해서 세웠겠지만 시비들은 눈에 거슬렀다. 좀 더 수준있는 내용의 시비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군데군데 풍경을 좀 먹는 전선은 지중매설을 하든가 하는 대책이 마련됏으면 한다. 시비나 전선은 옥의 티였지만 일몰에서 배울 수 있는 ‘질 때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과 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떠나온 점은 아쉬웠다.
운림산방을 갈까 하다가 날도 어둑해지고 하다보니 마지막으로 진도 쏠비치를 구경해 보기로 했다. 운림산방은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으니 한번도 방문하지 못한 진도 의신면 쏠비치를 택했다. 쏠비치가 너무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쏠비치를 한바퀴 돌면서 역사나 문화적으로 의미가 없다손치더라도 오늘날 우리나라 건축술의 위대함을 접할 수는 있었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눈과 카메라에 쏠비치의 풍경들을 담았다. 쏠비치가 알함브라 궁전 같다 했더니 실제 갔다 온 이의 ‘가보고 말 한거냐’ 한마디에 이국적이면 알함브라 궁전같다는 필자의 말이 조금 궁색해졌다. 모처럼 압도적 현대 토목공사의 건축물을 만났다. 앞으로 진도 가서 잘 곳 없다고 푸념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진도 여정은 명승지만을 쫓던 기존의 패턴에서 벗어나 모처럼 필자만의 기행이 되도록 노력을 했다. 진도의 풍경들에 필자의 마음이 축축하게 적신 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진도의 속살을 아쉬움 없도록 둘러보기 위해서는 몇 박을 해야 할 것이다. 짧은 시간에 알찬 여정의 목적만을 달성하려면 가분수 같은 형국이 될 듯 싶다. 가는 곳이 명경이 아닌 곳이 없을 터다. 예전의 그 진도가 아니다. 산만한 풍경들이 제법 정돈됐다. 전통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 발전해 가리라 믿는다. 난개발을 통해 섬의 유구한 자산을 파손하지 않기를 바라며 진도 여정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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